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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관식(卞寬植) -

- 생몰년 : 1899~1976
- 국    가 : 한국


卞寬植 1899. 3. 19.~1976. 2. 17.

한국의 동양화가.

호(號)는 소정(小亭).

한의사 변정연과 조선(朝鮮, 1392~1910) 화단(畫壇)의 마지막 세대인 조석진(542)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황해도 옹진(甕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천성적으로 반항 의식과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가 교차하는 야인(野人)으로 70평생을 일관하였다. 때로는 ‘반골(反骨) 작가’라는 칭호를 들으면서까지 화단의 야인으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다.

외할아버지 조석진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화가의 가풍(家風)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안중식(300)과 더불어 조선 화단에서 마지막 세대의 쌍벽(雙璧)으로 꼽혔다.

조석진은 화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변관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외손자에게 매를 드는가 하면 심한 꾸중을 하였다. 때문에 조석진이 지도하던 당시의 유일한 교육 기관이었던 서화 협회(書畫協會) 강습소에도 정식 입학할 수 없었다. 공식적인 교육 체계를 벗어나 독학(獨學)하였는데, 무엇보다 조석진이라는 거물을 극복하는 것이 화가로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였다.

평생 반항과 방랑으로 삶을 영위하면서 독보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유년 시절의 미술 입문 과정과 친연(親緣) 때문이었다. 만년(晩年)에 ‘그림은 나의 모든 것이었으며, 인생 그 자체’라고 술회한 것이나, ‘나의 한평생은 영원한 여인과 절승(絶勝)을 찾아 헤매는 역경’이라고 한 것은 작가적 기질이나 세계관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1910년 조석진을 따라 서울로 왔고, 4년 뒤인 15살 때 조선 총독부(朝鮮總督府) 공업 전습소(工業專習所) 도기과(陶器科)에 합격하여 2년 동안 도화(陶畫) 수업을 받았다.

이어 정식 입학은 아니지만, 1911년에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 미술원(畫美術院)에서 김은호(92)⋅노수현(126)⋅이상범(421) 등과 함께 공부하면서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독특한 화법(畫法)을 구사(驅使)하였다.

1923년 3월 9일, 당시 20대 전반의 신진 한국화가로 촉망받던 노수현⋅이상범⋅이용우(442)와 함께 전통 회화를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였다. 동연사는 우리 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同人會)로, 이들은 안중식⋅조석진으로부터 배운 전통 회화를 새로운 근대적 사조(思潮)와 감각에 맞게 개혁하기 위하여,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평동(平洞)에 모임 장소를 두고 신구화도(新舊畵道)를 함께 추구하였다. 이들은 또한 동인전의 개최를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923년 11월 보성 전문 학교[普成專門學校, 고려 대학교(高麗大學校)의 전신]에서 노수현과 이상범의 2인전을 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재정난으로 무산되었으며 동인회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동인회로서의 외형적 활동은 미약하였지만, 새로운 화풍(畫風) 수립의 노력은 동인들 각자를 통하여 추진되어, 향토적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한국 산수화풍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25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를 수료하였다.

1940년 조선 미술관(朝鮮美術館)에서 주최한 ‘10명가 산수 풍경화전’에 초대되어 명실공히 전통 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혔다. 그러면서 서울과 지방에서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광복 직후에 조선 미술 건설 본부(朝鮮美術建設本部)가 창설되자 동양화 분과 위원이 되었고,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의 심사 위원이 되어 화단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술계 이권 다툼의 터전이었던 국전(國展)의 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과 심사 부조리(不條理)를 개탄하고 국전에 얽힌 비리(非理)를 신문지상에 폭로하는 등 보통 사람으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반골 기질을 나타냈다. 타협과 야합으로 얼룩진 국전에 대하여 이러한 강력한 비판은 역시 그다운 행동의 하나였으며, 그만큼 강직하면서도 불의(不義)를 참아 내지 못하던 성격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고희(古稀) 기념전을 가졌고, 1971년에는 김은호⋅노수현⋅박승무(205)⋅이상범⋅허백련(607)과 함께 서울 신문사 주최 ‘동양화 6대가전’에 참여하였다. 이 전시회는 일제(日帝) 강점기에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던 전통 화가 10명 가운데 당시까지 생존하여 화단의 원로로 위치를 굳히고 있던 6명의 화가를 초대하여 다시 부각시킨 전시였으며, 뒷날 ‘동양화 6대가’라는 용어의 진원지이기도 한 전시회였다.

1974년과 1975년에 동아 일보사(東亞日報社)에서 주관한 회고전(回顧展)을 열었고, 이듬해 77세의 일기로 작고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무엇보다 한국의 자연을 실경(實景)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웅혼한 필치로 개성 있게 표현한 점을 들 수 있다. 중국적 관념 세계를 벗어나 실경의 현장성을 중요시하였으며, 적묵(積墨, 옅은 먹에서 짙은 먹으로 되풀이하여 덧붙여 그려, 대상에 질감과 입체감을 주는 기법)과 파선(破線)이라는 기법을 특징으로 하여 자신의 세계를 개성화하였다. 즉 산수(山水)를 표현할 때 그의 필법(筆法)은 짧고도 검은 먹선을 무수히 중첩시키는 기법을 활용하였다.

이 같은 태묵(笞墨)으로 산과 바위 또는 나무와 같은 소재를 선명하면서도 활기차게 표현하였다. 당시의 다른 작가들은 대개 세필(細筆)로 잔잔하게 대상을 묘사하는 등 화면 전체를 강약에 의한 대비나 과감만 구도 또는 농담(濃淡)의 불분명함 등으로 표현하여 글자 그대로 얌전한 문인 세계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재래의 관념 산수(觀念山水)가 지니고 있었던 허구성을 타파하고 개성 있는 실경 산수를 그리며 당시 화단의 매너리즘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스산한 가을 풍경이 많았는데, 이는 세필로 주로 이용하였던 이상범의 작품 세계와 대비가 되는 양식이었다. 이상범과 달리 이른바 적묵법(積墨法, 옅은 먹에서 짙은 먹으로 되풀이하여 덧붙여 그려, 대상에 질감과 입체감을 주는 기법)에 의하여 변화를 주고 있으며,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엄격한 사경(寫景)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풍치가 배어난다. 그러한 산세(山勢)에 접경되는 인물은 비탈진 산길을 뒤뚱거리며 올라가는 흰 두루마기의 촌로(村老)가 보여 주는 해학적(諧謔的)인 풍정에서 진정한 한국적인 야취(野趣)를 맛볼 수 있다.

화폭에 즐겨 등장하는 꾸부정하게 갈 길을 재촉하는 노인에서 보여 주듯이, 정적(靜的)인 자연 속에 이렇듯 속도감 있는 인물 묘사는 그만큼 화면 속에 긴장감이나 변화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화면상의 시점(視點)이 부감시(腑瞰視)에 따른 일종의 심원(深遠)의 형식이면서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므로 화면에 박진감과 함께 입체파(立體派, cubism)풍의 구조적 해석을 보여 준다.

거친 붓자국과 대담한 구성으로 한국의 자연을 형상화하여 근대 전통 화단에서 최고봉으로 꼽혔다. 그러나 그의 조형 세계는 아직도 현실 의식이 충분히 용해되지 않아 다소 도식적인 작품도 적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산야를 그려 놓고 중국의 고시(古時)를 형식적으로 적어 넣은 화제(畫題)가 흔하였던 것도 그 중 한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개성 있는 조형 어법으로 우리 나라의 산천을 믿음직스럽게 그려 낸 작가도 많지 않다.

작품으로 금강산 연작(聯作) [내금강 보덕굴(內金剛普德窟)]⋅[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121×264cm,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옥류청풍(玉流淸風)](1961년, 117×91cm, 개인 소장)⋅[외금강 삼선암도(外金剛三仙巖圖)](1959년, 개인 소장) 등과 [이어(鯉魚)] 등의 어해도(魚蟹圖), [농가(農家)의 만추(晩秋)](1957년,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무장춘색](1975년, 개인 소장)⋅[진양섭외](1957년, 개인 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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