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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임당(申師任堂) -

- 생몰년 : 1504~1551
- 국    가 : 한국


申師任堂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조선(朝鮮, 1392~1910)의 여류 서화가(書畫家).

호(號)는 사임당(師任堂, 思任堂, 師姙堂)⋅시임당(媤姙堂)⋅임사재(妊思齋, 任師齋), 본관(本貫)은 평산(平山).

‘사임당’은 중국 주(周)나라(B.C.1111~B.C.256/255)의 문왕[文王, ?~?, 중국 주나라의 창건자 무왕(武王, ?~?, 재위 B.C.1111~B.C.1104)의 아버지. 서백(西伯)]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의 당호(堂號)이다.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신명화(申名和), 어머니는 용인 이씨(龍仁李氏) 사온(思溫)의 딸로,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강릉에서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文章)⋅침공(針工)⋅자수(刺繡)에 능하였다.

19세에 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와 혼인하였으며, 친정에 머물다가 시집살이를 주관하기 위하여 38세 때 서울로 왔다.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 작품이 전해지며, 화풍(畫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조선 제일의 여류 화가라는 평을 받는다.

산수(山水)⋅포도⋅풀⋅벌레⋅묵매(墨梅, 수묵화의 매화)⋅묵죽 등을 잘 그렸는데, 산수에서는 안견(292)의 화풍과 강희안(24) 이래의 절파(浙派, 중국 명나라 말기 때 발생한 회화의 한 파) 화풍을 절충한 화풍으로, 16세기 전반에 생겨난 산수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 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월하고주도(月下孤舟圖)]에서 산들은 나지막하고 옆으로 길게 벋어 있으며, 수면을 따라 전개되는 공간은 막힘이 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작품의 구도나 공간 처리 등은 안견파의 것을 확산시킨 듯하지만, 필묵법(筆墨法)이나 준법[皴法, 동양화에서 산애(山崖)나 암석의 굴곡 등의 주름을 그리는 화법. 산이나 흙더미 등의 입체감⋅양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동양적 음영법(陰影法)]은 절파 계통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초충도(草蟲圖)](모두 8폭, 30×22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는 여성적인 섬세한 필치와 미려한 설채법(設彩法)을 구사(驅使)하였다. [초충조] 중에서 [가지](28.5×33.2cm)는 화폭의 중앙에 곡선진 가지의 두 줄기가 좌우 대칭을 이루며 서 있고, 섬약한 줄기들에는 밤색과 흰색의 가지들이 곱게 열려 있다. 가지 주변에는 종류가 다른 화초와 곤충들이 배열되어 있어 그림에 생동감을 더하여 주고 있다. 안정된 구도, 몰골법(沒骨法, 윤곽선을 쓰지 않고 수묵⋅채색으로 형체를 짓는 법)으로만 이루어진 묘사, 아담하고 음영을 살린 설채법 등이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보여 준다.

그녀의 화풍은 문신(文臣)이며 서화가인 넷째 아들 이우(443)와 맏딸 매창(梅窓) 이부인(李夫人, 1529~?)에게 전해졌다.

글씨는 초서(草書) 6폭과 해서(楷書) 1폭이 남아 있다. 1868년 강릉 부사(府使) 윤종의(尹宗儀, 1805~1886, 조선의 학자)는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板刻)하여 오죽헌(烏竹軒)에 보관하였다. 강릉을 떠나 대관령(大關嶺)을 넘어 서울 시댁으로 가면서 지은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과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이 널리 알려졌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志操)가 높았다.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고, 사대부(士大夫)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하여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는 [행장기(行狀記)]를 지어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순효한 성품 등을 기록하였다.

이 밖에 그림으로 [노안도(蘆雁圖)]⋅[산수도(山水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자리도(紫鯉圖)] 등 모두 40폭 정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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