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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수평(惲壽平) -

중국 청(淸)나라(1616~1912)의 문인화가(文人?家).

자(字)는 수평(壽平)·행(行)·정숙(正叔), 호(號)는 남전(南田)·운한외사(雲漢外史)·백운외사(白雲外史).

장쑤성(江蘇省) 무진(武進) 양후(楊胡)에서 태어났다.

명(明)나라(1368~1644)의 붕괴로 말미암아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명나라의 충신이었던 아버지에게 이끌려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아버지와 헤어져 만주족(滿洲族) 지배 계급의 한 고위층 가정에 입양되었다. 그러나 결국 비밀리에 한 불교 사원에서 아버지에게 되돌려졌다. 그는 이민족인 만주족 밑에서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시(詩)·서(書)·화(?)의 학구적인 예술 연마에 힘썼다.

부유한 왕휘(354)의 가까운 동무이자 동료였는데, 일설에 따르면 산수화(山水?)에서는 그가 자신보다 한 수 위임을 인정하였을 정도로 왕휘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묵 산수화(水墨山水?)를 즐겨 그렸으나, 왕휘의 그림을 본 뒤로는 화조화(花鳥?)에 전념하였다.

서숭사(235)를 본으로 하고 몰골법(沒骨法, 윤곽선을 쓰지 않고 수묵·채색으로 형체를 짓는 법)의 사생화(寫生?)풍에 명려한 부색(賻色)을 하여 수묵적인 운필(運筆)에 의한 새로운 화면을 개척하였다. 필선(筆線) 대신 선염법(渲染法, 먹이나 색이 짙고 옅은 단계로 종이에 번지듯 배어나는 화법으로, 붓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을 강조하는 몰골법을 이용한 화초화로 더 널리 알려졌다.

청나라의 화조화에는 황씨체[黃氏體, 중국 오대 촉나라의 화가 황전(628)이 시작한 화조화 화법의 한 양식]풍·서희(238)에 의하여 창시된 수묵 담채(水墨淡彩)의 서씨체(徐氏體)풍·창저우파(常州派)풍이 있었는데, 그는 창저우파에 속하며 명나라로부터의 화조화에 새로운 몰골 사생화태(沒骨寫生?態)를 더하였다.

회화 이론가였던 명나라의 문인화가 동기창(153)의 화론(?論)에 따라 회화의 정통적인 전통을 고수하였다.

산수화에는 소품이 많으며, 종이의 질과 모필의 성격을 잘 살리고 있는데, 화조화는 풍부한 색채에 금빛 바림[색칠할 때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차 엷게 칠하는 일. 그러데이션(gradation)]이나 가는 선(線)의 밀화적 묘법(密?的描法)을 덧붙인 격조 높은 것으로, 인상파(印象派, impressionism)적인 빛의 감각이 지적되고 있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의 4왕[왕감(336)·왕시민(348)·왕원기(350)·왕휘]·오력(319)과 함께 오파(吳派, 중국 명나라의 회화 유파. 북종화계의 절파에 대하여 남종화계 화가를 말한다.)의 정통을 이은 ‘사왕오운(四王吳?)’의 한 사람으로, ‘청초 6대가(淸初六大家)’라고 불리었다.

살아 있을 때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문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작품으로 <화훼 산수(花卉山水)>(1672)·<낙화유어도(落花游魚圖)>(1675)·<산수화조화(山水花鳥?)>(1675)·<산수화(山水?)>(1687)·<화조화(花鳥?)>(1687)·<화오석양도(花塢夕陽圖)>·<화훼도(花卉圖)>[호놀룰루 미술 아카데미(Honolulu Academy of Ar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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