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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영(李道榮) -

- 생몰년 : 1884~?
- 국    가 : 한국


李道榮 1884(고종 21). 3. 7.~1933

한국의 서화가(書畫家).

호(號)는 관재(貫齋)⋅면소(면艹巾巢)⋅벽허자(碧虛子), 본관(本貫)은 연안(延安).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 곳에서 죽었다.

안중식(300)과 조석진(542)의 문인(門人)이다.

1906년에 창립된 민중 계몽 단체 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 1906년 4월~1907년 8월 27일)의 간사(幹事)로 일하였으며, 대한 협회(大韓協會,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강제 해산된 대한 자강회를 재정비하여 1907년 11월 10일 창립된 정치 단체)의 교육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3월에 최초의 근대적인 대중 교육용 미술 교과서 [도화임본(圖畫臨本)]에 그림을 그렸다. 그 뒤 1911년에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 미술원(畫美術院)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09년 창간한 민족 언론 [대한 민보(大韓民報)]에 일제(日帝)와 반민족적인 인사들을 비판하고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시사적인 풍자화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선구적(先驅的)인 시사 만화는 전통 목판화(木版畫) 형식을 근대적으로 이어받은 점에도 그 의의가 크다.

1918년 6월 16일, 우리 나라 최초로 민족 서화가들의 단체로 순수 근대 미술 동인회(同人會)인 서화 협회(書畫協會)가 창립될 때 13명의 발기인(發起人)[강진희(23)⋅강필주(姜弼周, 1860?~1923, 한국의 화가)⋅고희동(37)⋅김규진(65)⋅김돈희(金敦熙, 1871~1937, 한국의 서예가. 서화 협회 제4대 회장)⋅김응원(93)⋅안중식⋅오세창(吳世昌, 1864~1953, 독립 운동가이며 언론인⋅서예가)⋅이도영⋅정대유(520)⋅정학수(533)⋅조석진⋅현채(玄采, 1856~1925, 한국의 사학자이며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서화 협회 전람회(協展)을 통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고색찬연(古色燦然)](1922년)⋅[옥당청품] 등의 기명 절지화(器皿折枝畫)에는 전통적인 중국식 청동기가 아닌 가야(伽倻, ?~562)나 신라(B.C.57~A.D.935) 토기(土器)를 사실적(寫實的)으로 그려 넣음으로써 민족적 형식을 추구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부터 동양화부(東洋畫部) 심사 위원으로 4차례 참여하여 비난을 산 뒤 그만두었다.

예서(隸書)⋅행서(行書)에 능하였고, 그림은 전통 화법(畫法)으로 산수(山水)⋅인물⋅화조(花鳥)⋅절지(折枝)⋅기명(器皿) 등에 뛰어났다. 화풍(畫風)은 필치가 단정하고 간결하며 정아(精雅)한 반면 대담한 면은 다소 없다.

작품으로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노안도(蘆雁圖)]⋅[연화백로도(蓮花白鷺圖)]⋅[추산도(秋山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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