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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훈(李思訓) -

- 생몰년 : 651~716
- 국    가 : 중국


李思訓 651~716

중국 당(唐)나라(618~907)의 화가.

대이 장군(大李將軍)이라고도 한다.

종실(宗室)의 한 사람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중국 당나라의 제3대 황제 고종의 아내.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재위 690~705) 때 많은 종실들이 피살되는 것을 보고 장두령(江都令)을 버리고 달아났다가 중종(中宗, 656~710, 중국 당나라의 제4대 황제. 재위 705~710)이 즉위하자 종정경(宗正卿)이 되었고, 현종(玄宗, 685~762,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 재위 712~756)이 즉위한 뒤에는 전공(戰功)으로 좌무위 대장군(左武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

산수화(山水畫)에 능하며, 품위와 격조가 높다는 평을 들은 화풍(畫風)은 당나라의 귀족 취미에 부합되어 화원(畫院)에 들어갔다.

같은 시대의 오도현(318)이 속필(速筆)에 소체(疎體)인 데 반하여, 육조 시대[六朝時代, 222~589, 중국 삼국 시대 오(吳)나라(222~280)⋅동진(東晉, 317~419)과 남조(南朝)의 송(宋)나라(420∼478)⋅제(齊)나라(479∼502)⋅양(梁)나라(502~557)⋅진(陳)나라(557∼589)를 합한 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정교⋅주밀한 묘법을 구사(驅使)하였다.

아들 이소도(429)는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받아 화가로 명성을 떨쳤으므로 이 부자를 흔히 ‘대소이부자(大小李父子)’ 또는 ‘대소이장군(大小李將軍)’으로 불리었다.

이사훈을 북종화(北宗畫)의 시조(始祖)라고 일컫는 데 대하여 대하여 약간 늦게 그림을 그린 왕유(351)는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畫)의 시조라고 하였다.

이들의 진적(眞跡)은 전하지 않지만 화풍은 채색이 아름답고 운필(運筆)이 세밀한 귀족 화풍이었다. 특히 청색과 초록색을 주로 사용하고 흰색과 금색을 섞어 썼다고 하여 청록산수화파(靑綠山水畫派) 또는 금벽산수화파(金碧山水畫派)라고 불렀다.

명(明)나라(1368~1644)의 문인화가(文人畫家) 동기창(153)이 이사훈의 장식적 전통과 왕유의 문인화 전통으로 양분한 것은 분명히 원래의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구분은 당대(當代)에 산수화의 표현 기법이 두 가지로 나뉘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라고 확실히 단정지을 만한 유작(遺作)은 없으며,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산수화 [강범누각도(江帆樓閣圖)](54.7×101.9cm, 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臺北國立古宮博物館>) 등 그와 그의 아들의 작례(作例)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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