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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범(李象範) -

- 생몰년 : 1897~1972
- 국    가 : 한국


李象範 1897. 9. 21.~1972. 5. 13.

한국의 동양화가.

호(號)는 청전(靑田).

아버지 이승원과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3형제 중 셋째 아들로, 충청 남도 공주(公州)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서 죽었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왔다.

10세부터 동네 노인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그 뒤 서울 사립 보흥 학교(普興學校)를 거쳐 1914년 계산 보통 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14년 18세 때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 미술원(畫美術院)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았다.

서화 미술원에서는 강진희(23)⋅강필주(姜弼周, ?~?, 한국의 동양화가)⋅김응원(93)⋅안중식(300)⋅이도영(403)⋅조석진(542) 등 당시 서화계의 대가(大家)들이 강사진으로 그림을 가르쳤으며, 그 중에서도 안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안중식은 그의 호를 따서 ‘청년 심전(心田)’이란 뜻으로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1918년 서화 미술원을 졸업한 뒤 안중식의 화실(畫室)인 경묵당(慶墨堂)에서 계속 그림 수업을 받았다.

1920년에는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 벽화 작업에 서화 미술원의 동문(同門) 김은호(92)⋅노수현(126)⋅오일영(325)⋅이용우(442)와 함께 참여하여, 그 중 [삼선관파(三仙觀波)]를 제작하였고, 중국 남종화법(南宗畫法)을 두루 섭렵하여 화필(畫筆)의 기초를 다졌다.

1921년 제1회 서화 협회(書畫協會) 전람회(協展)에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제3회 협전(協展)에 [하경산수(夏景山水)]와 [해진 뒤]를 출품하였다.

1922년 조선 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3⋅1 운동 이후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연 제1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추강귀어(秋江歸漁)]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이 때의 작품은 남⋅북종 화법(畫法)과 안중식의 영향을 많이 드러냈으나 [해진 뒤]와 1923년 제2회 선전(鮮展)에 출품한 [모연(暮煙)] 등에서는 중경(中景)이 강조되고 현실감이 강화되는 등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였다.

1923년 3월 9일, 당시 20대 전반의 신진 한국화가로 촉망받던 노수현⋅변관식(216)⋅이용우와 함께 전통 회화를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였다. 동연사는 우리 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同人會)로, 이들은 안중식⋅조석진으로부터 배운 전통 회화를 새로운 근대적 사조(思潮)와 감각에 맞게 개혁하기 위하여,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평동(平洞)에 모임 장소를 두고 신구화도(新舊畵道)를 함께 추구하였다. 이들은 또한 동인전의 개최를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923년 11월 보성 전문 학교[普成專門學校, 고려 대학교(高麗大學校)의 전신]에서 노수현과 이상범의 2인전을 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재정난으로 무산되었으며 동인회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동인회로서의 외형적 활동은 미약하였지만, 새로운 화풍(畫風) 수립의 노력은 동인들 각자를 통하여 추진되어, 향토적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한국 산수화풍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26년 [조선 일보(朝鮮日報)]에 삽화가로 입사하였으며, 1928년 [동아 일보(東亞日報)] 학예부로 자리를 옮겨 삽화를 그렸다.

1935년 이여성(437)과 2인전을 열어 당시 국내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1936년 손기정(孫基禎, 1912~2002, 한국의 체육인. 마라톤 선수로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日章旗抹消事件)’에서 일장기를 지운 역할로 직접 연루되어 경찰에 붙잡혔다가 40여 일 만에 풀려났다.

그 뒤 동아 일보사를 그만두고 금강산(金剛山) 등을 여행하며 실경(實景) 스케치를 하였으며, 후진 양성 기관 ‘청전 화숙(靑田畫塾)’ 운영에 전념하였다.

선전에서 제1회(1922년)부터 연3회 입선한 뒤 제5회(1926년) [첩장(疊嶂)], 제6회(1927년) [우후(雨後)], 제7회(1928년) [산그늘], 제8회(1929년) [만추(晩秋)], 제9회(1930년) [귀로(歸路)] 등 10차례에 걸쳐 특선을 하였으며, 제16회(1937년)부터는 그 해에 신설된 전년도 특선 작가에 주어지는 무감사로, 1938년 제17회부터 심사 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약으로 말미암아 선전에는 청전 아류(亞流)의 그림이 속출되었다.

초기에는 안중식의 영향 아래에서 세심한 필선(筆線)을 중심으로 관념 산수(觀念山水)를 그렸으며, 후기로 들어가면서 미점[米點, 중국 북송(北宋, 960~1126)의 문인화가 미불(187)⋅미우인(191) 부자(父子)가 창안하였다고 전해지는 미법 산수(米法山水)의 한 기법]을 되풀이하여 사용하는 미점법으로 부드럽고 평온한 풍경을 표현하였으며, 한때 습윤한 분위기의 일본화(日本畫)풍을 보였다. 그가 미점법을 사용한 것은 1930년을 전후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한국의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리면서 중국 송(宋)나라(960~1270) 때의 화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10여 년 동안 같은 화풍을 답습적으로 되풀이하여 평론가들에게는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1947년 종합 미전(綜合美展)의 심사 위원이 되었다.

1949년 첫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에 추천 작가로 출품하였고, 그 해 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 교수가 되어 1961년 정년 퇴임 때까지 재임하였다.

1949년 이화 여자 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 강사를 겸하였으며, 1953년부터 국전(國展) 심사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예술원(藝術院) 회원에 선임되었고, 1956년부터 미술가 협회 고문(顧問)에 추대되었으며, 1961년 홍익 대학교 명예 교수가 되었다.

1963년 3⋅1 문화상 본상을 받았고, 1966년 서울 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1971년에는 김은호⋅노수현⋅박승무(205)⋅변관식⋅허백련(607)과 함께 서울 신문사 주최 ‘동양화 6대가전’에 참여하였다. ‘동양화 6대가전’은 일제(日帝) 강점기에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던 전통 화가 10명 가운데 당시까지 생존하여 화단(畫壇)의 원로로 위치를 굳히고 있던 6명의 화가를 초대하여 다시 부각시킨 전시였으며, 뒷날 ‘동양화 6대가’라는 용어의 진원지이기도 한 전시회였다.

동아 일보사 주최로 신문 화랑(新門畫廊)에서 회고전(回顧展)을 열었으며, 1982년에는 서울 국립 현대 미술관(國立現代美術館) 10주기(週忌) 기념 특별전이 있었다.

광복된 뒤 ‘청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미점법으로 낮은 산과 언덕을 안정된 구도로 전형화하였다. 1950년에 그린 [금강산 만물상(金剛山萬物相)]에서 실질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청전 양식은 언덕 위를 걸어가는 촌로(村老)와 바람에 휘날리는 자잘한 잡목과 초가집을 통하여 순박한 한국적 풍경의 진수(眞髓)를 보여 주었다.

굵고 가는 짙은 먹의 획을 되풀이하기도 하고 갈필(渴筆, 붓에 먹물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서 그리는 동양화 묘법)의 가는 필선(筆線)으로 잔돌을 표현하기도 하면서 그의 독특한 준법[皴法, 동양화에서 산애(山崖)나 암석의 굴곡 등의 주름을 그리는 화법. 산이나 흙더미 등의 입체감⋅양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동양적 음영법(陰影法)]을 형성하였다.

완숙기에 들어가면서 작품은 외진 산골의 적막하고 소박한 풍경과 아주 낮은 언덕의 풍경 속에서 한국적 산야의 평범함을 표현하였다. 독자적이며 한국적인 산수화가로서 장승업(497)⋅정선(522) 이후 최고의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이경성(李慶成, 1919~, 한국의 미술 평론가)은 ‘한국의 평범한 서민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이룩하고 이를 특유희 한국적 감성과 미의 세계를 정형화시킨 그의 예술적 생명력은 한국화의 한 결정체’라고 평하였다.

[초동(初冬)](1926년)⋅[외금강 만물상(外金剛萬物相)](1950년)⋅[산가(山家)](1955년,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추경(秋景)](1957년, 77×148.5cm, 서울 한국 방송 공사)⋅[모추(募秋)](1965년)⋅[원각사(圓覺寺) 벽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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