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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련(任用璉) -

- 생몰년 : 1901~?
- 국    가 : 한국


任用璉 1901. 3. 18~?

한국의 서양화가.

일명 임파(任派).

평안 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태어났다.

서울 배재 고등 보통 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지금의 배재 중⋅고등 학교) 재학 중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쫓겨 중국으로 탈출,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의 금릉 대학교(金陵大學校)에 다녔다.

1922년 미국으로 가서 시카고 미술 학교(The School of the The Art Institute of Chicago)를 졸업하였고, 1926년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에 입학하여 미술을 전공하였고, 미술과 수석(首席)으로 졸업하였다.

1929년 예일 대학교 장학금으로 1년 동안 파리에서 미술 연구를 하던 중 서양화가 백남순(211)을 만나 결혼하였다.

1930년 귀국하여 [동아 일보(東亞日報)] 옥상 전시장에서 부부전(夫婦展)을 가진 뒤 국내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1년 평안 북도 정주(定州)의 오산 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敎鞭) 생활을 하면서 목일회(牧日會)의 동인전(同人展)을 통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다. 목일회는 1934년 결성되어 활동하였던 서양화가들의 단체로, 서울 종로(鐘路)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에서 제1회 작품전을 가졌다. 그러나 단체의 이름이 일본을 배격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사용 금지당함에 따라 모임이 해체된 상태였다가, 1937년 이름을 목시회(牧時會)로 바꾸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회원은 임용련 부부를 비롯하여 구본웅(47)⋅길진섭(60)⋅김용준(86)⋅송병돈(宋秉敦, 1902~1967, 한국의 화가)⋅신홍휴(申鴻休, 1911~1961, 한국의 화가)⋅이마동(407)⋅이병규(412)⋅이종우(464)⋅장발(495)⋅황술조(623) 등 주로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출신이었다. 그림의 성향은 대개 일본 양화(洋畫)의 기법을 따르는 보편적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와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범주였으나, 파리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순수주의(純粹主義, purisme) 사조(思潮)를 따르는 야수파(野獸派, fauvisme<Wild Beasts>)적인 표현이나 과감한 반전통적 방법을 시도하는 성향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사회적 배경과 양화에 대한 인식의 저하를 극복하지 못하고,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단체였던 목시회는 1938년 ‘9인 양화 동인전’을 끝으로 활동을 마감하였다.

광복된 뒤 모든 작품을 북한에 남겨 두고 월남(越南)하였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금강산 풍경]과 [에르블레의 풍경](1930년, 32.5×24cm,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뿐이다.

미군정(美軍政) 장관 고문(顧問)⋅서울 세관장 등을 지내던 중 6⋅25 전쟁 때 납북(拉北)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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