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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주(張景周) -

- 생몰년 : 1710~? 
- 국    가 : 한국


張景周 1710(숙종 36)~?

조선(朝鮮, 1392~1910)의 화가.

자(字)는 예보(禮甫), 본관(本貫)은 인동(仁同).

태어난 곳이나 죽은 해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의 ‘경(景)’자를 ‘경(敬)’으로 쓰기도 한다.

아버지 장득만(張得萬, 1684~1764, 조선의 화가)은 종6품 아문(衙門)인 도화서(圖畫署) 화원(畫員)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어진 화가(御眞畫家)로 활동하였다. 손자는 장한종(507), 증손(曾孫)은 장준량(505)으로 화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화서 화원으로, 사천(泗川) 현감(縣監)을 거쳐 지사(知事)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초상화에 뛰어났고, 어용(御容)을 모사(模寫)할 때에는 대개 주필(主筆, 主管畫史)을 맡았다.

1744년(영조 20년) 영조(英祖, 1694~1776, 조선의 제21대 왕. 재위 1724~1776) 어진 도사(圖寫)에 참여한 뒤, 1748년 숙종(肅宗, 1661~1720, 조선의 제19대 왕. 재위 1675~1720) 어진을 개모(改摹)할 때 김희겸(115)⋅장득만⋅정홍래(535) 등과 함께 참여,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규상(李圭象, 1727~1799, 조선의 학자)의 [일몽고(一夢稿)]에 따르면, 영조 연간(年間)의 문관⋅무관⋅종친 등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는 대부분 그가 그렸다고 한다.

초상화를 모사한 최초본은 모두 하나의 책으로 묶어 그의 집안에 두었다고 하는데 전해지지는 않는다.

작품은 모두 없어지고 현재 남아 있는 작품에는 아버지와 정홍래(535)⋅조창희(趙昌禧) 등과 함께 1744년 기사(耆社, 조선 시대에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입사한 8인의 대신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린 [기사 경회첩(耆社慶會帖)](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과 [조선 영조왕 이금상(朝鮮英祖王李昑像)](보물 932호) 등이 있다.

[기사 경회첩]은 훈염법(暈染法) 위주로 다루어지던 조선 후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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