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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룡(趙熙龍) -

- 생몰년 : 1789~1866
- 국    가 : 한국


趙熙龍 1789(정조 13)~1866(고종 3)

조선(朝鮮, 1392~1910)의 서화가(書畫家).

자(字)는 치운(致雲), 호(號)는 호산(壺山)⋅우봉(又峯)⋅석감(石憨)⋅철적(鐵笛)⋅단로(丹老)⋅매수(梅叟), 본관(本貫)은 평양(平壤).

중인(中人) 출신으로, 경상 남도 진주(晉州)에서 태어났다.

20대에는 이재관(456)⋅이학전(李鶴田)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1813년(순조 13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及第), 여러 벼슬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1844년(헌종 10년) 김수팽(金壽彭)⋅김홍도(110)⋅박태성(朴泰星) 등 41명의 전기(傳記)가 실려 있는 [호산외사(壺山外史)](모두 39편, 고려 대학교 도서관)를 편찬하였다.

1846년(헌종 12년) 왕명으로 금강산(金剛山)을 탐승하고 시를 지어 바쳤으며, 1848년에는 궁궐 편액(扁額)의 글씨를 쓰라는 명을 받았다.

1847년에는 나기(羅岐)⋅유숙(371)⋅유재소⋅유최진(柳最鎭, 1791~?, 조선의 서화가)⋅전기(510)⋅조중묵(549) 등과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하고 김정희(99)파의 여항 문인(閭巷文人) 서화가들과 시(詩)⋅서(書)⋅화(畫)를 통하여 교유하였다.

1851년(철종 2년) 김정희 일당으로 지목되어 북제주군(北濟州郡) 추자도(楸子島)로 유배되었다.

김정희의 문하(門下)에서 학문과 서화를 배우고, 19세기 중엽 화단(畫壇)에서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고서화(古書畫)와 함께 골동품을 좋아하였고 중국과 우리 나라 회화사(繪畫史)에 관심이 많았으며, 중국 청(淸)나라(1616~1912) 화적(畫籍)을 직접 소장하고 비평을 하는 등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서화에도 능하며, 글씨는 추사체(秋史體)를 잘 썼고, 그림은 산수(山水)⋅나비와 함께 사군자(四君子), 특히 매화(梅花)를 잘 그렸다.

화론(畫論)에서는 수예(手藝)를 강조하고 재능을 중시하여 서화가에게는 학식뿐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손의 재주, 즉 기량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정희가 강조하였던 간일한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畫)풍에 바탕을 두되 다양한 구도와 담채(淡彩)의 대범한 구사(驅使), 필치의 자유로운 운영,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실험 의식, 거리낌없는 표현력을 통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畫風)을 이룩하였다.

그림으로 [강안박주도(江岸泊舟圖)]⋅[동파립극도(東坡笠극圖)]⋅[매화도병(梅花圖屛)](361×56.5cm, 개인 소장)⋅[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45.1×106.1cm, 서울 간송 미술관)⋅[수묵산수도(水墨山水圖)]⋅[위로인란(慰勞人蘭)]⋅[홍매도(紅梅圖)](30.2×127.5cm, 개인 소장)⋅[홍백매팔곡병(紅白梅八曲屛)](1854년 이후, 375.5×124cm, 서울 일민 미술관)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중인 계층 명사(名士)들의 전기집 [호산외기(壺山外記)], 귀양시의 기록 [해외난묵(海外蘭墨)], 회고록(回顧錄)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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