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년
: ?~?
- 국 가
: 중국
崔白 ?~?
중국 북송(北宋, 960~1126)의 화가.
자(字)는 자서(子西).
안후이성(安徽省) 호량[濠梁, 지금의 펑양(平壤) 동쪽]에서 태어났다.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중국 북송의 시인이며 정치가. 소식(蘇軾)]보다 연상(年上)이고, 곽희
(43)와는 비슷한 연배이다.
꽃과 새 등 연지도(蓮池圖)와 수금도(水禽圖)를 장기(長技)로 하고, 연꽃⋅오리⋅기러기의 정교한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고, 도석 인물화[道釋人物畫, 신선(神仙)이나 불교의 고승(高僧)⋅나한(羅漢) 등의 인물을 그린 그림, 道釋畫]와 불화(佛畫)를 그려 이름이 높았다.
신종(神宗, 1048~1085, 중국 북송의 제6대 황제. 재위 1067~1085)은 그를 화원(畫院)의 예학(藝學)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성격이 호방하여 보직(補職)을 받지 않고 화원과 관계를 가지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나중에 황제의 특별 분부가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허락을 받고 나서야 벼슬을 받아들였다.
오대(五代, 907~960) 이래 화원의 화조화(花鳥畫)는 황전
(628)에 의하여 시작된 황씨체(黃氏體)를 이어받고 있었으나, 그는 서희
(238)에 의하여 창시된 수묵 담채(水墨淡彩)의 서씨체(徐氏體)를 터득하여 화원의 화풍(畫風)에 종합적이며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적인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
황전의 화풍이 북송의 화조화를 지배한 지 100년이 넘었으나, 최백과 그의 제자 오원유(吳元瑜)에 이르러 격식이 바뀐 뒤 새로운 면모가 나타났다. 최백과 오원유 두 사람 모두 휘종
(637) 및 그 뒤의 화조화풍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화조화는 황파(黃派)에 비하여 묘사 대상이 광범위하며 화법(畫法)도 생동감이 넘친다. 강호(江湖)와 교외(郊外)에 풍설(風雪)이 엇갈리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경물(景物)에도 뛰어났다. 필력이 웅건하고 변화무쌍하며, 색감도 청신하고 우아하다. 특히 새⋅짐승과 자연 경물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중시하였고, 항상 사람의 감정을 이입시켰으며, 새의 생명력에 대하여 찬사를 표하였다. 또 큰 화면의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그 기세가 웅건하고 생동적이다.
소동파와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중국 북송의 정치가이며 시인⋅문필가)은 그를 찬미한 시를 남겼다. 오원유와 제자 최각 역시 세류의 기조를 변화시키고 이른바 원체(院體)를 이루었다. [선화화보(宣和畫譜)]에는 그들 세 명의 작품이 497폭 가량 실려 있는데, 지금은 다만 최백의 [쌍희도(雙喜圖)]⋅[죽구도(竹鷗圖)]⋅[한작도(寒雀圖)]만 전한다.
석각(石刻) [포대나한도(布袋羅漢圖)]에는 소동파의 제찬(題贊)이 있는데, 최백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밖에도 남송(南宋, 1127~1279)의 자수품 한 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