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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華嵓) -

- 생몰년 : 1682~1756
- 국    가 : 중국


華嵓 1682~1756

중국 청(淸)나라(1616~1912)의 화가.

자(字)는 덕숭(德嵩)⋅추악(秋岳), 호(號)는 신라산인(新羅山人)⋅동원생(東園生)⋅포의생(布依生)⋅이구거사(離垢居士).

푸젠성(福建省) 팅저우(汀州) 상항(上杭)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집이 가난하여 제지(製紙) 공장에서 일하였으며,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여 독학(獨學)으로 그림을 공부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어렸을 때 절에서 벽화를 그린 일이 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민간의 심미관(審美觀)을 깊이 체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시인이었는데, 작품 속에 문인화(文人畫)의 기질을 융합하였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 현승(縣丞)의 직분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 살면서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였다.

나중에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양저우 팔괴(揚州八怪)’의 김농(68)⋅왕사신(汪士愼, 1686~1762, 중국 청나라의 화가)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산수(山水)⋅화조(花鳥)⋅인물 등을 잘 그렸고 담묵(淡墨)⋅담채(淡彩)에 뛰어났으며, 시(詩)⋅서(書)⋅화(畫)를 모두 잘 하여 ‘삼절(三絶)’이라고 불리었다.

화조화는 명(明)나라(1368~1644)의 구화점엽파(鉤花點葉派)를 이어받았고, 또한 운격(361)의 화법(畫法)을 참조하여 세필(細筆)로 사의적(寫意的, 외형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그린다는 뜻으로, 수묵화나 문인화가들이 이러한 경지를 추구하였다.) 그림을 그렸다. 제재가 다양하고 필치가 생동감 있으며, 작품의 풍격은 청신하고 빼어나며 생동적이고 꾸밈이 없다. 인물화는 구상이 절묘하게 과장되어 있으며 색채는 밝고 화려하였고 묘사가 우아하고도 빼어났다.

진홍수(568)의 화법을 받아들였으나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산수화의 필법(筆法)은 당인(141)⋅석도(240)⋅운격의 영향을 받았고, 이전 대가(大家)들의 성과를 여러 방면으로 흡수하여 한 가지 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매우 뛰어난 풍격을 보여 준다. 그의 그림은 당시 사회에서 폭넓게 환영받았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 [대붕도(大鵬圖)]⋅[산수도](클리블랜드 미술관<The Cleveland Museum of Art, Ohio>)⋅[천산적설도(天山積雪圖)]⋅[추성부의도(秋聲賦意圖)]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이구집(離矩集)]⋅[해도관시집(解弢館詩集)] 등이 전한다.

한편, ‘양저우 팔괴’란 청나라 중기 장쑤성 양저우에서 활동한 8명의 화가, 즉 고상(高翔, 1688~1754)⋅김농⋅나빙(117)⋅왕사신⋅이방응(411)⋅이선(425)⋅정섭(523)⋅황신(624)을 이른다. 이들 외에 고봉한(34)⋅민정(閔貞)⋅화암을 포함하여 양저우파(揚州派)라고도 한다. 이들은 대운하(大運河)의 수리(水利)와 소금 거래에 기반을 둔 호상(豪商)들의 원조를 받으려고 모여든 화가들로, 독자적인 화풍(畵風)과 화역(畵域)을 가지면서 당시의 전형적인 문인화에서 벗어난 자유 분방한 그림을 그렸다. 시골에서 대도시로 올라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고답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 당시로서는 기괴하게 여겨져 ‘괴(怪)’자가 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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