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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金禔) -

- 생몰년 : 1524~1593
- 국    가 : 한국


金禔 1524(중종 19)~1593(선조 26)

조선(朝鮮, 1392~1910)의 문인화가(文人畫家).

자(字)는 계수(季綏), 호(號)는 양송당(養松堂)⋅양송헌(養松軒)⋅양송거사(養松居士)⋅취면(醉眠), 본관(本貫)은 연안(延安).

잠시 사포별제(司圃別提)를 지냈으나, 1537년(중종 32년) 좌의정(左議政)이었던 아버지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조선의 문신)가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중종(中宗, 1488~1544, 조선의 제11대 왕. 재위 1506~1544)의 계비(繼妃)]의 폐위를 꾀하다가 사약(賜藥)을 받자, 벼슬에 오르지 않고 독서와 서화(書畫)로 일생을 보냈다.

1590년(선조 23년)에는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다양한 화풍(畫風)을 소화하여 조선 초기와 중기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인물⋅산수(山水)⋅우마(牛馬)⋅영모(翎毛, 새와 짐승 등을 소재로 그린 그림)⋅초충(草蟲)에 이르기까지 정묘한 경지에 이르러 당시 최립(崔笠, 1539~1612, 조선의 문인이며 문신)의 문장과 한호(韓濩, 1543~1605, 조선의 서예가. 石峯)의 글씨, 김시의 그림을 일컬어 ‘삼절(三絶)’이라고 하였다.

안견파(安堅派) 화풍과 남송(南宋) 원체화(院體畫)풍을 따르면서도 당시로는 새로운 화풍이었던 절파(浙派, 중국 명나라 말기 때 발생한 회화의 한 파) 화풍을 적극 수용하였다.

화풍은 손자 김식(78)에게 이어졌으며, 그가 수용한 절파 화풍은 김명국(72)⋅이흥효(479) 등 17세기 화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작품으로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46×111cm, 보물 제783호,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목우도(牧牛圖)](일본, 개인 소장)⋅[선록완월도(仙鹿翫月圖)]⋅[여인사생도(女人寫生圖)]⋅[우배도하도(牛背渡河圖)]⋅[청산모우도(靑山暮雨圖)]⋅[하산모우도(夏山暮雨圖)]⋅[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1584년, 67.2×53cm,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 Ohio>)⋅[황우도(黃牛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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