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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ázquez) -

- 생몰년 : 1599~1660
- 국    가 : 에스파냐


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 8. 6.

에스파냐의 화가.

에스파냐 남부 세비야(Sevilla)주의 주도(州都) 세비야에서 태어났으며, 1599년 6월 6일에 세례(洗禮)를 받았고, 수도(首都) 마드리드(Madrid)에서 죽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바(Juan Rodrigues de Silva)는 인두세(人頭稅)를 면제받는 이달기아(hidalgia)라는 소귀족으로, 농지와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 헤로니마 벨라스케스(Jerónima Velázquez)는 에스파냐 남부 지중해(地中海) 연안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방 농부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포르투갈 출신이라는 점과 성(姓)을 물려받은 어머니가 농민 출신이라는 점은 나중에 귀족으로의 신분 상승을 꾀하던 그에게 적잖은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화가로서보다는 진지하고 교양이 풍부한 전기(傳記) 작가 겸 이론가로 더 알려진 그의 스승이며 장인(丈人)인 파체코(1024)가 펴낸 [회화 예술, 고대부터 근대까지(El Arte de la Pintura, su Antiguedad y Grandeza)](1649년)를 통하여 주로 알려져 있다. 벨라스케스가 남긴 기록이라곤 편지 두 통밖에 남아 있지 않아, 벨라스케스의 활동을 파악하는 데 이 책은 중요한 구실을 하며, 또한 그레코(62)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벨라스케스에 대한 완전한 전기,특히 만년(晩年)의 행적에 대해서는 팔로미노(Antonio Palomio de Castro y Velasco, 1655~1726, 에스파냐의 궁정 화가이며 미술 학자)의 [미술관과 시각적 단계(El Museo pictórico y escala óptica<The Pictorial Museum and Optical Scale>)](모두 3권, 1715~1724년)의 제3권 [에스파냐 파르소나(El Parnaso español<The Spanish Parnassus>)]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에스파냐의 바사리(449)’라 불릴 정도로 미술 관련 저자로도 이름이 높은 팔로미노는 이 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16~17세기 에스파냐 화가들과 조각가들에 대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벨라스케스에 관한 최초의 사료(史料) 편찬집이기도 하다.

1655년에 태어난 팔로미노는 1660년에 죽은 벨라스케스와 직접 접촉할 기회는 없었지만, 벨라스케스와의 제자이며 팔로미노의 후원자인 후안 데 알파로(Juan de Alfaro, 1643~1680)와 친분이 있어서 소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팔로미노의 자료가 얼마나 정확한지와는 별개로, 그의 글은 그것과 대등한 비중을 지닌 다른 자료가 없기 때문에 벨라스케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현대 학자들은 팔로미노의 글을 직접 인용하거나 재인용하였으며, 때로는 그의 글이라는 1차 자료만 잘 살폈어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착오를 저지르기도 한다.

벨라스케스의 개인적인 기록은 매우 적으며, 그의 그림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도 비교적 드물다. 작품에 서명(署名)이나 날짜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자와 제작 연도(年度)를 밝히는 데는 양식상의 증거만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의 초상화는 분명히 그의 화실(畫室)에서 조수(助手)들에 의하여 모사(模寫)된 것이 많지만 그 자신의 작품은 많지 않으며, 그의 서명이 들어 있는 작품 중 남아 있는 것은 150점도 채 안 된다. 그림을 천천히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기에는 마드리드에서의 궁정(宮廷) 관리직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팔로미노에 따르면, 첫 번째 스승은 세비야의 에레라(754)였고, 1611년 공식적으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화가 파체코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도제(徒弟)가 되어 그림을 배웠다. 정신면에서도 이 문화 도시 세비야와 파체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1618년 그의 딸 후아나 데 미란다(Juana de Miranda, 1602~1660)와 결혼하였다.

파체코는 자기의 사위이며 제자인 벨라스케스를 매우 자랑스러워하였으며,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5년 동안 교육과 수련을 시킨 뒤 그의 미덕과 성실성, 훌륭한 자질에 감동받아 그의 기질과 뛰어난 재능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의 딸과 혼인시켰다.’

벨라스케스가 초기의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양식을 발전시킨 것은 바로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였다. 파체코는 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실물을 기초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다양한 자세의 모델을 대상으로 많은 스케치를 그림으로써 인물 묘사에서 뛰어난 수준에 도달하였다.’

환상적(幻想的)인 초기 양식에서 볼 수 있는 단단한 모델링과 뚜렷한 명암 대비는 이탈리아의 바로크(Baroque) 화가 카라바조(868)가 혁신한 것 중 하나인 테너브리즘(tenebrism, 명암 대비에 의한 극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17세기 회화 기법)이라는 극적인 명암법과 매우 비슷하다.

초기 작품은 그 당시의 에스파냐 화가들과 다름없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明暗法, chiaroscuro, 대상의 형태를 관찰하여 빛의 현상에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 관계 및 그 변화를 파악하여 입체감 있게 표현하는 방법)으로 경건(敬虔)한 종교적인 주제를 그렸으나, 이미 대중과 일상 생활의 소재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엿보였다.

초기 주제는 주로 종교적이거나 풍속적(일상 생활의 장면)이었다. 에스파냐의 회화에서 ‘보데곤(bodegón, 17세기 에스파냐의 정물화 양식)’이라는 새로운 구성 양식을 널리 퍼뜨렸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정물이 있는 부엌 장면을 그린 [달걀 프라이를 만들고 있는 노파(老婆)(Old Woman Frying Eggs)](1618년, 119.5×100.5㎝,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등이 있다.

때때로 보데곤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Martha and Mary)](1618년쯤, 런던 국립 미술관)에서처럼 배경에 종교적인 장면을 취하였다. [동방 박사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1619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는 세비야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로 지금도 에스파냐에 남아 있다.

[세비야의 물장수(Water Seller of Seville)](1619년쯤, 런던 웰링턴 미술관)에 나타난 구도⋅색채⋅명암의 조절과 인물 및 그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의 자연스러움, 사실적(寫實的)인 정물(靜物) 묘사는 이미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붓놀림을 보여 주고 있다.

펠리페 4세[Felipe Ⅳ, 1605~1665, 에스파냐의 왕(재위 1621~1665)이며 포르투갈의 왕(재위 1621~1640)]가 왕위에 오른 지 1년 뒤인 1622년, 궁정의 후원을 얻기 위하여 처음으로 마드리드로 갔다.

펠리페 4세는 1615년 앙리 4세[Henri Ⅳ, 1553~1610, 부르봉가(Bourbon家) 출신 최초의 프랑스 왕(재위 1589~1610)이며, 나바르(Navarre)의 왕(엔리케 3세. 재위 1572~1589)]와 마리 드메디시스(Marie de Médicis, 1573~1642, 프랑스의 왕 앙리 4세의 왕비이며, 루이 13세의 어머니)의 딸 이자벨 드 부르봉(Isabelle de Bourbon, 1603~1644)과 결혼하였는데, 1629년 왕자 발타사르 카를로스(Balthasar Carlos)가, 1638년 왕녀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 1638~1683,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비)가 태어났다.

마드리드에서 공고라이아르고테(Luis de Góngora y Argote, 1561~1627, 에스파냐 문학 황금 시대의 최대 시인)의 초상화(1622년, 보스턴 미술관)를 그렸지만, 펠리페 4세나 왕비의 초상화를 그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세비야로 돌아왔다.

1623년 8월, 세비야의 동향인(同鄕人)이며 그 뒤 그의 후원자가 된 올리바레스(Gaspar de Guzman y Pimental conde–duque de Olivares, 1587~1645, 에스파냐의 총리. 재임 1623~1643) 백작의 부름을 받아 다시 마드리드에 갔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뒤 곧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왕은 그의 솜씨에 매료되었고, 이 그림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 이외에는 어느 화가도 왕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한다는 약속과 함께 그 해 10월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평생토록 왕의 예우(禮遇)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要職)까지 맡았다.

파체코는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의 기마(騎馬) 초상화(나중에 분실되었다.)에 대하여 ‘풍경을 포함한 모든 것이 실물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 초상화는 ‘모든 궁정인의 찬탄과 다른 화가의 부러움을 받으며’ 공개 전시되었다.

궁정에서의 지위로 말미암아 왕의 수집품을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화풍(畫風)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베네치아의 화가 티치아노(1012)의 그림이 많았다. 펠리페 4세의 전신 초상화(1626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와 그의 아우 돈 발타사르 카를로스(Don Baltasar Carlos) 왕자의 전신 초상화(1626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는 티치아노가 세운 에스파냐 왕가의 초상화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그의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이 초상화들에서는 그가 세비야에서 그린 그림들에서 볼 수 있었던 상세한 묘사와 테너브리즘은 완화되었고, 다만 얼굴과 손이 강조되고 밝은 배경을 바탕으로 어두운 색의 인물화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료 화가들은 벨라스케스가 사람의 머리만을 그릴 수 있을 뿐이라고 비난하였으며, 그들의 이러한 시기로 말미암아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다른 궁정 화가들과 겨루어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무어인들의 추방(Expulsion of the Moriscos)](나중에 분실되었다.)을 그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이 경쟁에서 이겨 상을 받았고, 1627년에 펠리페 4세의 궁정 의전관(儀典官)으로 임명되었다.

계속 다른 주제들도 그렸지만 궁정 화가로서 주로 왕가와 그 측근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전념하였으며, 이 기간에 펠리페 4세의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파체코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위대한 군주로부터 매우 후하고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궁 안에 넓은 화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은 화실 열쇠와 화실 안에 전용 의자를 마련해 두어, 거의 날마다 한가한 때는 그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곤 하였다.’

1628년에 플랑드르(Flandre) 바로크 양식의 대가(大家) 루벤스(279)가 두 번째로 에스파냐의 궁정을 방문하였을 때 그와 만났으며, 그 뒤 후기의 궁정 초상화들에서 루벤스의 좀더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채색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파체코에 따르면,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의 꾸밈없는 작품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명암법에 의한 작도(作圖)의 마지막 걸작 [술고래들(Los Borrachos<The Topers>)](또는 [바커스의 승리(Triumph of Bacchus)]로도 알려져 있다. 1628~1629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주제에 대한 그의 사실적 접근은 에스파냐 고유의 특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뒤 전 생애에 걸쳐 이러한 접근 방식을 유지하였다.

팔로미노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와 함께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42km 떨어진 엘 에스코리알 궁전(El Escorial Palace, 왕궁과 역대 왕의 종묘 및 예배당과 수도원 등으로 이루어진 르네상스 건축물)을 방문하고 그 곳의 대작(大作)들을 구경한 뒤 이탈리아에 가고 싶어졌다.

왕에게 여행 허가와 2년치 봉급을 받고 올리바레스 백작에게는 후원금과 추천장을 받아, 1629년 8월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Liguria) 지방 제노바(Genova)주의 주도(州都) 제노바로 떠났다. 당시 마드리드 주재(駐在) 이탈리아 대사(大使)가 보낸 문서에는 그가 왕과 올리바레스 백작이 총애하는 젊은 초상화가로서 그림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갈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실제로 그의 미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파(派)(Scuola Veneziana)의 영향으로, 작품은 중기(中期)의 밝고 선명한 색조와 경묘한 필치로 바꾸어졌다. 팔로미노에 따르면, 베네치아로 가서 그 곳에서 16세기 후반 베네치아파 회화의 대가 틴토레토(1014)의 작품을 모사하였고 얼마 뒤 로마로 갔다.

또한 파체코의 전기에 따르면, 바티칸 궁전(Vatican Palace)에 여러 개의 방을 얻었지만 외부로부터 너무 고립되었음을 알고, 르네상스의 거장(巨匠) 라파엘로(206)의 그림과 미켈란젤로(436)의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을 모사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 빌라 메디치(Villa Medici)로 옮겼는데, 그 곳은 지대가 높고 공기가 좋았으며 고대 조각의 복제품이 있어 모사할 수 있었다. 뒤에 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에스파냐 대사관 근처로 옮겼다.

이 무렵 정열을 기울여 궁정의 어릿광대와 난쟁이를 그린 많은 초상화들은 그를 미술사상(美術史上) 최대의 초상화가로 군림하게 하였다. 이 불행한 사람들을 왕족과 다름없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것은 인간 존재의 중요성과 그 본질적인 비극성까지 추구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가 자연주의 양식으로 묘사한 인물과 정물을 보면 그의 뛰어난 관찰력을 짐작할 수 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하면서 여기에 영향을 받아 사물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당대(當代)로서는 독특하게도 시각적 인상을 강조한 걸작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로마에서 1년을 보낸 뒤 에스파냐로 돌아오다가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주의 주도 나폴리(Napoli)에서 머물렀으며, 1631년 초 마드리드에 도착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그린 소묘(素描)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탈리아에서 그린 몇 점의 그림 중 로마에서 그린 것이라고 파체코가 말한 [자화상(自畫像, Self–Portrait)]은 복제품으로만 남아 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그린 작품으로 로마에서의 [불카누스의 대장간(The Forge of Vulcan)](1630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야곱에게 보내진 요셉의 피묻은 외투(Joseph’s Bloody Coat Brought to Jacon)](1630년, 엘 에스코리알 궁전)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에스파냐 국왕에게 바쳤다. 이 두 점의 웅장한 인물화는 예전에 습득한 단순한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와는 거리가 멀다.

이탈리아와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한 결과 공간⋅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빛⋅색채의 처리와 보다 폭넓은 기법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일생 동안 추구한 시각적 현상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있어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다시 초상화가로서 중요한 직무를 맡았으며, 때때로 왕의 방을 신화적(神話的)인 주제의 그림으로 장식하도록 의뢰받았다. 그 뒤의 종교적인 작품은 대단히 훌륭하고 독특한 성향을 띠고 있다.

세비야에서 그린 초기 그림의 경건한 분위기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웅장한 구도를 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Christ on the Cross)](1631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왕의 초상화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전통적인 구도를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창의력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의 새로운 사냥용 별장 토레 데 라 파라다(Torreda de la Parada, ‘천국의 땅’)를 장식하기 위하여 그린 [페르난도 왕자(Infante Fernando)](1632~1635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말을 탄 왕비 이자벨 드 부르봉(Equestrian Portrait of Isabelle de Bourbon)](1634~1635년), [말을 탄 펠리페 4세(Equestrian Portrait of Philip IV)](1634~1635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왕이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멧돼지를 사냥하고 있는 펠리페 4세(Philip IV Hunting Wild Boar)](1635~1636년, 런던 국립 미술관), [메니푸스(Menippus)](1639~1640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솝(Aesop)] 등 비공식적인 초상화와 초상화와 비슷한 고전적인 주제를 다룬 몇 점의 인물화를 새로운 양식으로 그렸다.

사냥꾼의 차림을 한 [말을 탄 왕자 돈 발타사르 카를로스(Prince Don Baltasar Carlos on Horseback)](1634~1635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사냥꾼 왕자 발타사르 카를로스(Prince Baltasar Carlos as Huntsman)](1635~1636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의 왕자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총명한 모습은 아직도 벨라스케스의 화폭에 담겨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15세 때인 1646년에 죽었다.

1635년에 완성된 새로운 부엔레티로 궁전(Buen Retiro Palace)의 알현실(謁見室)을 장식하기 위하여, 티치아노의 [뮐베르크의 카를 5세(Charles V at Mühlberg)](1548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를 시작으로 그 뒤 루벤스가 이어받은 전통에 따라, 왕을 주제로 한 일련의 기마 초상화를 그렸다. [말을 탄 올리바레스(Equestrian Portrait of Olivares)](1634~1635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등 이러한 기마 초상화들은 루벤스의 바로크 양식보다는 티치아노의 양식에 더 가까운 균형과 조화를 띠고 있는데,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세세한 소묘나 강렬한 명암 대비 대신 풍부한 붓놀림과 자연광을 이용하여 3차원적인 효과를 달성하였다.

대구도(大構圖)의 [브레다성(城)의 함락(The Surrender of Breda)](1634~1635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도 부엔레티로 궁전의 알현실을 장식하기 위하여 일련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그림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의 정교한 구도는 루벤스의 회화 양식에 기초를 두었지만, 세부의 정확한 정밀 묘사와 주요 인물의 살아 있는 듯한 묘사를 통하여 생생한 실재감을 전달하고 있다.

한편 여인을 그린 몇 점의 비공식적인 초상화 중 하나인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Lady with a Fan)](1635~1640년쯤, 런던 월리스 컬렉션)은 미묘하고 섬세한 채색법과 뛰어난 감각의 인물 묘사로 널리 알려졌다.

에스파냐 왕비의 기도실을 위하여 그린 [성모(聖母)의 대관식(戴冠式)(Coronation of the Virgin)](1641~1642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을 주제로 한 그림에 어울리는 매우 웅대한 구도 속에서 부피가 크고 화려한 의복이 신성한 사람의 엄숙함과 위엄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린 궁정 소인(小人)들의 초상화(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는 왕과 귀족의 것과 똑같은 공정하고 통찰력 있는 눈을 보여 주고 있는데, 소인의 기형성은 그들의 어색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자세와 개성적인 표현을 통하여, 매우 자유 분방하고 대담한 붓놀림에 의하여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1649년 초 두 번째로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위하여 에스파냐를 떠났다. 이번에는 궁정 시종(侍從)으로서의 공식적인 직무를 맡았다. 그는 펠리페 4세가 인노켄티우스 10세(Innocentius Ⅹ, 1574~1655, 제236대 교황. 재위 1644~1655)에게 보내는 선물일 것으로 생각되는 그림들의 운반을 맡았다. 이 여행의 주요 목적은 궁정의 새로운 방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림과 고미술품을 구입하고 그 방의 천장을 장식하기 위하여 프레스코(fresco,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물기가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그림) 화가를 고용하며 에스파냐에 프레스코를 재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회화와 티치아노로부터 다시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먼저 베네치아로 가서 베로네세(482)⋅티치아노⋅틴토레토의 그림들을 구입하였다. 그 다음에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주 모데나(Modena)로 가서 자신이 1638년에 마드리드에서 그린 [모데나 공작의 초상(Duke of Modena)](1638년, 모데나 에스테 미술관)이 있는 공작의 컬렉션을 구경하였다.

팔로미노의 전기에 따르면, 이 두 번째 여행에서 에밀리아로마냐주 볼로냐(Bologna)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머물렀는데, 볼로냐에서는 마드리드에서 일할 프레스코 화가들과 계약을 맺었다. 팔로미노는 벨라스케스가 로마에서 당시 프랑스 화단(畫壇)을 지배하였던 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 화가 푸생(1062)과 이탈리아의 바로크 조각가 베르니니(491) 등 화가 및 고위 성직자들과 교유(交遊)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팔로미노는 벨라스케스가 정선(精選)한 고미술품의 목록을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을 보면 그는 16세기 이래 중요한 수집가들의 전통을 따라 질이 떨어지는 원품보다는 오히려 로마에 있는 가장 널리 알려진 조각상의 복제 주조품(鑄造品)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벨라스케스는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실물을 기초로 한 습작(習作)으로 그의 물라토(mulatto, 백인과 흑인의 혼혈) 노예 후안 데 파레하(Juan de Pareja, 1610?~1670, 1650년 벨라스케스가 해방시켜 주었다.)의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Portrait of Juan de Pareja)](1649~165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그렸다. 이것은 예외적인 비공식적 초상화로 대담하게 그려졌으며 친근하고 생생한 초상의 효과를 강하게 자아내고 있다. 이 그림은 1970년 554만 4,000달러에 팔렸는데, 이 금액은 당시 경매된 미술품으로는 가장 높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다른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하나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Portrait of Innocent X)](1650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공식 작품 중 하나인 이 초상화를 그릴 때, 라파엘로가 [율리우스 2세(Julius II)](1511~1512년쯤, 런던 국립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시도하고 나중에 티치아노가 [바오로 3세 및 그의 손자들 오타비오와 알레산드로 파르네제 추기경(Paul III and His Grandsons Ottavio and Cardinal Alessandro Farnese)](1546년,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을 그릴 때 사용한 교황 초상화의 전통 양식을 따랐다.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1659년까지 산티아고 수도회(修道會)(Order of Santiago)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초상화로 말미암아 에스파냐 기사단(騎士團)(Spanish Military Order)의 회원이 되기 위한 매우 까다로운 신청 과정에서 교황의 후원을 얻었다.

강렬한 느낌을 주는 머리와 심홍색을 화려하게 배합한 커튼⋅의자⋅코프(cope,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들이 성찬식을 수행하지 않을 때 입었던 겉옷) 등은 티치아노의 후기 양식을 능가하는 섬세한 붓놀림과 능숙한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에스파냐 밖에서 오랫동안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 평가되어 온 이 초상화는 수없이 복제되었으며, 이 그림으로 이탈리아에서도 곧 알려져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1650년에는 로마의 화가 단체 아카데미아 디 산루카(Accademia di San Luca)와 ‘콘그레가치오네 데이 비르투오시 알 판테온(Congregazione dei Virtuosi al Pantheon)’의 회원이 되었다.

로마를 처음 여행하였을 때 머물렀던 빌라 메디치를 주제로 한 [빌라 메디치의 정원, 아리아드네의 파비용](1650~1651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과 [빌라 메디치 전경(全景)(Views of the Villa Medici, Rome)](1650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등 두 점의 작은 풍경화는 양식적으로 볼 때 두 번째로 로마를 여행한 기간에 그린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남아 있는 작품 중 순수하게 풍경을 다룬 독특한 작품으로, 19세기의 인상주의를 예고한 그림이다.

이른바 [로케비 비너스(Rokeby Venus)](또는 [거울을 보는 비너스(The Toilet of Venus)], 1651년쯤, 런던 국립 미술관)라고 하는 그림도 이탈리아에서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19세기 이전의 에스파냐 회화에서는 희귀한 여인 누드화 중 하나이다. 비너스의 몸단장에 관한 주제와 화려한 채색 및 선정적인 피부 색조는 주로 티치아노 등의 베네치아파 화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독특하게 모델을 꾸미거나 이상적(理想的)으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의 비너스 그림은 당대로서는 예외적으로 실재 여자의 누드를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1649~1651년의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장기간 연찬(硏讚)을 거듭하여 기법상의 혁신이 완성되었다.

1651년 여름에 선물을 사 가지고 마드리드로 돌아왔으며, 펠리페 4세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왕은 이듬해 왕의 방을 정리하고 왕의 여행을 준비하는 직책인 궁정 시종에 임명하였다.

한편 1644년 왕비 이자벨 드 부르봉이 죽자 펠리페 4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Habsburg家) 쪽에서 마리안 폰 외스트리히(Maria von Oestrich, 1634~, 마리아 안나)를 새 왕비로 맞이한다. 1651년 새 왕비는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ita–Teresa)를 낳는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를 벨라스케스는 ‘꼬마 천사’라고, 펠리페 4세는 ‘내 귀여운 강아지’라고 불렀다.

1653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전(前)왕비 이자벨 드 부르봉의 딸인 15살 된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녀의 초상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오스트리아의 왕비 마리아나(Queen Mariana of Austria)](1652~1653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와 [핑크 드레스를 입은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The Infanta Margarita in a Pink Dress)](1653~1654년, 빈 미술사 박물관)을 빈(Wein)에 보냈다.

1654년 1월, 마드리드 주재 베네치아 대사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이 초상화들이 파리에 도착하였다고 쓰고 있다. 이 두 초상화는 유사한 구도법을 사용하였으며, 많은 화실에서 이들의 복제품이 만들어졌다. 왕가의 여자들은 커다란 머리 장식과 치마 속을 버팀살대로 장식하여 마치 인형같이 묘사되어 있다.

펠리페 4세의 흉상(胸像)을 그린 두 점의 후기 초상화 [펠리페 4세의 초상(Portrait of Philip IV)](1654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656년쯤, 런던 국립 미술관)은 성격이 매우 다르고 왕의 비공식적인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서 예외적인 작품인데, 현재 많은 복제품이 있다. 슬픔에 잠긴 늙은 군주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린 이 마지막 초상화들은 그가 그린 왕의 모든 초상화 중 가장 친밀감을 주는 작품에 꼽힌다.

많은 공식적인 초상화 외에도 말년에 매우 독창적인 구도로 두 점의 뛰어난 걸작을 그렸다. 태피스트리[tapestry, 다채로운 선염색사(先染色絲)로 그림을 짜넣은 직물] 공장의 풍속적인 장면을 그린 [힐란데라(Las Hilanderas)](또는 [베 짜는 여인들(The Spinners)], [아라크네의 우화(寓話)(The Fable of Arachne)])(1655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와 [왕가(王家, The Royal Family)]라고도 알려져 있는 [시녀(侍女)들(Las Meninas<The Maids of Honour>)](1656년쯤, 276×318㎝,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다.

[힐란데라]는 아테나(Athēnē,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과 지성의 여신으로 아테네의 수호신)와 아라크네(Arachnē,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베짜기에 뛰어난 여인)의 베짜기 경쟁에 관한 고대 그리스의 신화를 나타낸 그림이다. 여기에서는 초기의 여러 ‘보데곤’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인 장면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주제가 배경에 깔려 있다. 그러나 이 후기 작품에서 신화와 현실 세계 사이에 경계가 없으며, 그 두 세계가 형식에 지나지 않은 뛰어난 원근법적 구도로 결합되어 있다.

만년의 대작인 [힐란데라]는 평생의 화업(畫業)을 집약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선(線)에 의한 윤곽과 조소적(彫塑的)인 양감(量感)이라는 기법이 투명한 색채의 터치로 분해되어, 공기의 두께에 의한 원근법의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전동(顫動)하는 빛의 파도에 씻기고, 완전히 대기(大氣)를 파악하는 공간과 기법은 시대를 크게 앞지르고 있어, 인상파(印象派, impressionism)를 예고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녀들]에서는, 시녀와 하인을 거느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뒤쪽 멀리에 있는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배경의 거울 속에 그들의 상이 보일 뿐이다.)를 그리는 동안 자신의 작업실에서 순간적으로 우연한 장면을 얼핏 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 복잡한 구도에서는 거의 실물 크기의 인물이 중앙의 공주와 조명원(照明源)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자세한 정도가 다르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 자신이나 당대의 어떤 다른 화가도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나게 실재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후기 양식에서는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고 자유로운 ‘스케치풍’의 기법을 사용하여 형태⋅질감(質感)⋅장식의 효과를 달성하고 있다. [어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Portraits of the young Infanta Margarita)](1659년, 빈 미술사 박물관)과 [필리페 프로스페로 왕자(Prince Felipe Próspero)](1659년, 빈 미술사 박물관)는 구도의 양식이 서로 비슷하고 그의 작품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꼽히는데, 모델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매우 섬세하게 정면에 왕가의 위엄을 드러내면서도 그 이면에는 모델의 어린애 같은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1660년 봄, 왕과 왕실을 따라 프랑스 국경으로 가서, 루이 14세[Louis ⅩⅣ, 1638~1715, 부르봉 절대 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왕. ‘태양왕(Le Roi Soleil<Sun King>)’. 재위 1643~1715]와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결혼식을 거행할 에스파냐풍의 파빌리언(pavilion, 누각)을 장식하였다. 또한 [마르가리타 공주(Infanta Margarita)](1660년, 150×220㎝,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등 후기에 그린 공식적인 작품의 대부분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Madrid)에 있다.

마드리드에 돌아온 뒤 곧 병에 걸려 1660년 8월 6일에 죽었다.

그는 도제나 직계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았다. 유럽에서 19세기 초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는데, 그 무렵 외국, 주로 영국의 수집가들은 세비야에서 그린 초기 그림의 대부분을 입수하였다.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질감⋅공간⋅빛⋅분위기의 효과를 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주요 선구자(先驅者)가 되었다.

종교화와 신화화는 모두 주제의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조형성(造形性) 탐구라는 근대성을 가지며, 백⋅흑⋅회색의 해조(諧調)된 색채가 비속화(卑俗化)나 이상화(理想化)에 치우치지 않는 독자적인 리얼리스트로, 17세기 에스파냐 미술사(美術史)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며 전세계적으로도 위대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밖의 작품으로 [프라가에서 펠리페 4세(Philip IV at Fraga)](1644년, 뉴욕 프릭 컬렉션)⋅[마르스(Mars)](1645~1648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메르쿠리우스와 아르고스(Mercury and Argus)](1659년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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