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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수현(盧壽鉉) -

- 생몰년 : 1899~1978
- 국    가 : 한국


盧壽鉉 1899~1978. 9. 6.

한국의 동양화가.

호(號)는 심산(心汕).

경기도 개성(開城)(또는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으며, 제주도(濟州道) 제주에서 죽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다.

서울 보성 소학교(普成小學校)를 거쳐 191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가, 그 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 미술원(畫美術院) 화과(畫科)로 옮겼다.

동급생 이상범(421)⋅최우석(579)과 함께 안중식(300)⋅조석진(542)으로부터 관념 산수(觀念山水) 중심의 그림 수업을 받았고, 1918년 졸업한 뒤에도 안중식의 화숙(畫塾) 경묵당(耕墨堂)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1920년에는 김은호(92)⋅오일영(325)⋅이상범⋅이용우(442)와 함께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 벽화 제작에 참여하였고, 1921년 동아 일보사(東亞日報社)에 입사하여 삽화와 만화 등을 그렸다. 그 해부터 열린 서화 협회(書畫協會) 전람회(協展)에 해마다 참여하였으며,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도 제1회(1922년)부터 제11회(1932년)까지 출품하였다.

1923년 3월 9일, 당시 20대 전반의 신진 한국화가로 촉망받던 변관식(216)⋅이상범⋅이용우와 함께 전통 회화를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였다. 동연사는 우리 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同人會)로, 이들은 안중식⋅조석진으로부터 배운 전통 회화를 새로운 근대적 사조(思潮)와 감각에 맞게 개혁하기 위하여,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평동(平洞)에 모임 장소를 두고 신구화도(新舊畵道)를 함께 추구하였다. 이들은 또한 동인전의 개최를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923년 11월 보성 전문 학교[普成專門學校, 고려 대학교(高麗大學校)의 전신]에서 노수현과 이상범의 2인전을 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재정난으로 무산되었으며 동인회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동인회로서의 외형적 활동은 미약하였지만, 새로운 화풍(畫風) 수립의 노력은 동인들 각자를 통하여 추진되어, 향토적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한국 산수화풍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23년 조선 일보사(朝鮮日報社)로 옮겨 삽화와 만화를 계속 그렸으며, 1926년 제5회 선전(鮮展)에 입선, 1929년에는 조선 박람회(朝鮮博覽會)에 입선하여 금패를 받았다.

1940년 ‘10대가전(十大家展)’에 참여하였고, 심산화숙(心汕畫塾)을 세워 1948년까지 제자를 길러 냈다.

일제(日帝)가 전시(戰時) 체제를 강화하던 1942년 ‘화필보국(畫筆保國)’이라는 취지로 결성된 조선 남화 연맹전(朝鮮南畫聯盟展)에 출품하였다.

광복된 뒤에는 조선 미술 건설 본부(朝鮮美術建設本部) 동양화 부위원장을 지냈고, 1948~1961년 서울 대학교 교수로 일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에 심사 위원으로 참여한 이래 1960년 제9회까지 계속 관여하였으며, 1961년 국전(國展) 기구가 개편되자 고문(顧問)으로 추대되었다.

1962년 서울 대학교 명예 교수, 예술원(藝術院) 회원에 선임되었으며, 1971년 김은호⋅박승무(205)⋅변관식⋅이상범⋅허백련(607)과 함께 서울 신문사 주최 ‘동양화 6대가전’에 참여하였고, 1974년 회고전(回顧展)을 열었다. ‘동양화 6대가전’은 일제 강점기에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던 전통 화가 10명 가운데 당시까지 생존하여 화단(畫壇)의 원로로 위치를 굳히고 있던 6명의 화가를 초대하여 다시 부각시킨 전시였으며, 뒷날 ‘동양화 6대가’라는 용어의 진원지이기도 한 전시회였다.

서화 미술원에서 수업을 받을 때와 1920년대 초까지는 정형화된 관념 산수를 그렸으나 동연사 활동에 참여한 1923년 이후 근대적인 창작 방법을 보였다.

실재하는 산수를 합리적인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에 바탕하여 묘사하는 근대적 조형관을 보임으로써 근대 동양 화단에 실경 산수화(實景山水畫, 고려 시대와 조선 초⋅중기에 자연 경관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는 심산 화숙과 서울 대학교에서 양성된 후진들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1950년대 이후에는 산수 형태를 이상화(理想化)하여 조형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데 치중하여, 웅장한 바위산의 형태미를 묘사한 것이 많다. 만년(晩年)에는 산과 바위의 윤곽선에 황갈색 태점(苔點, 산이나 바위, 흙덩이, 나뭇가지에 난 이끼를 나타내는 작은 점들)을 사용하여 화면의 장식성을 높였다.

조선 미술상(朝鮮美術賞)⋅서울 특별시 문화상⋅예술원상⋅은관(銀冠) 문화 훈장 등을 받았다.

[고금영서(古今迎書)]⋅[성재수간(聲在樹間)](1920년)⋅[귀초(歸樵)](1923년)⋅[산촌귀목(山村歸牧)](1924년)⋅[소림원수(疎林遠岫)](1925년)⋅[일난(日暖)](1925년)⋅[우후(雨後)](1930년)⋅[대흥사 추경(大興寺秋景)](1940년)⋅[산촌(山村)](1956년,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계산정취](1957년,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송청(送靑)](1957년)⋅[춘경(春景)](1960년)⋅[추경(秋景)](1968년)⋅[추강홍엽(秋江紅葉)](1976년, 88×53cm, 개인 소장)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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