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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상봉(都相鳳) -

- 생몰년 : 1902~1977
- 국    가 : 한국


都相鳳 1902. 1. 6.~1977. 10. 19.

한국의 서양화가.

호(號)는 도천(陶泉).

부유한 집안의 맏아들로, 함경 남도 홍원(洪原)에서 태어났다.

보성 고등 보통 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3년생으로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6개월 동안 옥고(獄苦)를 치렀다.

1920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고희동(37)에게 서양식 그림을 배웠고, 이듬해 일본으로 가서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미술로 방향을 바꾸어, 1922년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 니가하라 고타로(長原孝太郞)⋅오카다 사부로스케(岡田三郞助)⋅와다 에이사쿠(和田英作, 1874~1959, 일본의 서양화가)⋅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1867~1943, 일본의 서양화가) 등에게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27년 도쿄 미술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연수과(演修科)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다가, 1928년 나상윤(羅祥允, 1906∼)과 결혼하였다.

도상봉과 동향(同鄕)인 나상윤은 함흥(咸興)에서 여학교를 다닌 뒤, 1925년 4월에 일본으로 가서 도쿄 여자 미술 학교(東京女子美術學校) 서양화과 선과(選科)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27년 9월에 자퇴하고 이듬해 도상봉과 결혼하여 서울로 와서 정착하였다. 작품은 1930년 제9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입선한 유화(油畫) [도쿄 제국 대학 구내 풍경(東京帝國大學構內風景)] 정도가 알려져 있다.

도상봉은 일제(日帝)가 식민지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마련한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 출품을 외면하고, 민족 미술가들의 모임이었던 서화 협회(書畫協會) 전람회(協展)에 몇 번 참가하였다.

1930년부터 경신 고등 보통 학교(儆新高等普通學校)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큰 기복 없이 자연미 재현에 충실한 꽃과 정물(靜物) 등을 주로 그렸다.

1931년 서울 종로구(鐘路區) 명륜동(明倫洞)에 양화 연구소인 ‘숭삼 화실’을 차렸는데, [명륜당(明倫堂)](1933년)⋅[여인 좌상(女人坐像)](1933년)으로 대표되는 초기 작품은 1930년대 화단(畫壇)의 아카데미즘을 반영하여 대체로 고전적 엄격성을 보였다.

배화 여자 고등 학교(培花女子高等學校)(1935년)⋅경기 여자 중학교(京畿女子中學校)(1946년) 교사를 거쳐 1948년부터 숙명 여자 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교수로 있으면서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 심사 위원, 예술원(藝術院) 회원, 대한 미술 협회(大韓美術協會) 위원장을 지내는 등 일선 미술 행정가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부터는 엄격한 구조와 장식적인 색채, 사실적(寫實的)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를 결합하고 있다. 이는 [항아리와 국화(菊花)](1954년)에서 잘 나타난다.

말년에는 주로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렸다. 정물화 [항아리](1952년, 1953년, 1967년, 1975년)에는 애장품 조선 백자(白瓷)가 몇몇 등장하고, 풍경화 [한정(閑庭)](1949년)⋅[풍경(風景)](1953년)⋅[성균관(成均館)](1954년)⋅[성균관 풍경](1959년)⋅[비원(祕苑)](1960년)⋅[추양(秋陽)](1970년)⋅[향원정(香遠亭)](1970년)⋅[광릉 풍경(光陵風景)](1973년)⋅[풍경 A](1974년) 등에는 가까운 산책길이나 고궁 등 작가가 좋아하는 주변의 자연 풍경을 주로 담았으며, 정적감(靜寂感)을 주는 특유의 부드러운 색채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 화가로 전통적인 예술 세계를 지키는 데 충실하였으며, 백자나 라일락을 소재로 한 정물화와 풍경화를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하였다. 정적(靜的)인 소재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에서 온화하고 여성적인 독특한 미적(美的) 세계를 엿볼 수 있다.

3⋅1 문화상⋅예술원상⋅국민 훈장 모란장⋅문화 예술상 등을 받았다.

동화 화랑(1955, 1957, 1959년)⋅신세계 화랑(1967~1969년)⋅현대 화랑(1970~1975, 1987년) 등 죽은 뒤에까지에도 여러 차례의 개인전이 열렸고, 몇십 차례의 단체전에 출품하였다.

이 밖의 작품으로 [출가 전](1953년)⋅[우산과 여인 좌상](1955년)⋅[코스모스](1958년)⋅[정물](1966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라일락](1968년)⋅[매화(梅花)](1968년)⋅[라일락](1970년, 53×45cm)⋅[백자 항아리가 있는 정물]⋅[개나리](1973년)⋅[국화](1973년)⋅[안개꽃](1974년)⋅[모과](1975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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