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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창(董其昌) -

- 생몰년 : 1555~1636
- 국    가 : 중국


董其昌 1555~1636

중국 명(明)나라(1368~1644)의 문인(文人)이며 화가⋅서예가.

자(字)는 현재(玄宰), 호(號)는 사백(思白)⋅향광(香光)⋅사옹(思翁), 시호(諡號)는 문민(文敏).

가난한 사대부(士大夫) 집안으로, 장쑤성(江蘇省) 쑹장(宋江) 화팅현(華亭縣)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과거(科擧)에 떨어졌지만 34세 때인 1589년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고, 제관(諸官)을 지냈다.

난징(南京)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승진하였으나 환관(宦官)들의 횡포와 극심한 당쟁(黨爭) 때문에 그만두고, 1631년에 옛 자리로 복귀하여 3년 뒤에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죽은 뒤에 태자태부(太子太傳)의 벼슬이 추증(追贈)되었다.

관리(官吏)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문명(文名)도 높아 시인⋅서가(書家)⋅문인화가(文人畫家)⋅미술 전문가로 널리 알려졌고, 감식(鑑識)⋅감장(鑑藏)⋅임모(臨模) 등에도 업적을 남겼으며, 그가 제시한 개념은 중국 미학(美學) 이론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제일의 문인으로 각 방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므로 화단(畫壇)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고, 그 화풍(畫風)이나 소론(所論)은 후세 오파(吳派, 중국 명나라의 회화 유파. 북종화계의 절파에 대하여, 남종화계 화가를 말한다.) 문인화가들에게 결정적인 감화를 주었다.

중국화에 대한 저술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문집 [화선실 수필(畫禪室隨筆)]에서 남종화(南宗畫)를 북종화(北宗畫)보다도 더 정통적인 화풍으로 한다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하였다. 16년쯤 연상(年上)의 동료인 막시룡(165)이 처음 제시한 방법에 따라 중국화를 북종화와 남종화로 나누고, 그 계보를 추적하여 두 갈래 전통을 분석하였다.

남종화는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진리의 깨달음을 강조한 반면, 북종화는 그러한 통찰력을 보다 점진적으로 터득하도록 가르쳤다고 주장하였다. 남종화파에 속하는 화가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들과 문인화가들이었는데, 이들은 그림의 기능이나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대중의 취향보다는 비슷한 감수성을 가진 상류층 지식인들에게 더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종화파의 ‘직업’ 화가들은 자기 내면의 본질을 거의 나타내지 않고 즉각적인 시각적 호소력을 지닌 아름다운 화면을 창조하려고 애썼다.

남종화파가 추구한 학자적 이상(理想) 한가운데에는 서예가 있었다. 서예는 회화적(繪畫的) 묘사를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운필(運筆)하는, 한 개인의 진정한 본질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림은 거연(26)⋅동원(155)을 스승으로 하였고, 송(宋)(960~1270)⋅원(元)(1271~1368)의 화가들의 장점을 빠짐없이 소집하고, 문징명(181)⋅심주(285) 등의 오파 문인화의 남종화풍을 이어받아 발전시켜 그 근거를 원나라의 황공망(620)에서 찾았다. 특히 예찬(315)⋅오진(327)⋅왕몽(341)⋅황공망 등 이른바 ‘원말 4대가(元末四大家)’를 좋아하였다. 이들은 모두 문인화가로서 가장 높은 이상을 보여 주는, 사심 없는 성격과 개성적인 표현 양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표현 양식과 소재에서는 그들에게 받은 영향을 드러내고 있지만, 예술에서 직관적인 미감(美感)을 모두 추방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형태와 겉보기에 파격적인 공간 묘사, 필묵(筆墨)의 부자연스러운 운용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는 그들을 상당히 능가하였다. 그의 글은 그의 다양한 저서에서뿐 아니라 그림에도 실려 있다.

스스로 고아수윤(古雅秀潤)이라고 부르던 화풍으로, 먹물 빛깔의 변화가 풍부하며 간명한 산수화(山水畫)를 많이 남겨 창작 활동과 실제 화업(畫業)을 화론(畫論)과 병행하여 전개하였다.

문학에도 능통하였고, 또 서예가로서도 명나라 제일이었으며,

서화가(書畫家) 미만종(186)과 함께 ‘남동북미(南董北米)’의 칭호를 들었으며, 형동(邢愼, 1551~1612, 중국 명나라의 서예가)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어 ‘북형남동(北邢南董)’이라고 불리었고, 미만종⋅장서도(496)⋅형동과 나란히 ‘명말 4대가(明末四大家)’로 불리었다. 그의 서예는 원나라 초 서화(書畫)의 천재 조맹부(539)와 문징명, 궁극적으로는 당(唐)나라(618~907)와 진(晉)나라(936~946, 後晉) 대가(大家)들의 뒤를 이었다.

문징명이나 조맹부와 마찬가지로, 그의 창작적 접근 방식은 진지하고 잘 단련되어 있으며 학구적이고 체계적이다. 또한 고대의 문화를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본보기로 삼은 서체(書體)의 겉모습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는 그 정신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서체는 왕희지(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의 서예가)를 주종으로 삼으면서도 글씨 체형보다도 내용을 더 추구하였다.

‘화중구우[畫中九友, 중국 명 말 청나라 초의 시인이며 화가인 오위업(323)이 ‘화중구우가(畫中九友歌)’에서 읊은, 문장이 뛰어난 벗 아홉 사람. 또는 그것을 그리는 화제(畫題). 아홉 사람은 동기창⋅변문유(卞文瑜, 1576~1655)⋅소승미(邵僧彌, 1593~1642)⋅양용우(楊龍友)⋅왕감(336)⋅왕시민(348)⋅이류방(405)⋅장학증(張學曾)⋅정가수(程嘉燧, 1565~1643)]’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작품으로 [건계산수도(建溪山水圖)]⋅[방양승몰골산수도(倣楊昇沒骨山水圖)]⋅[산수고책(山水高冊)]⋅[자화상(自畵像)], 지은 책으로 [산수화책(山水畫冊)]⋅[용태집(容台集)]⋅[화안(畫眼)]⋅[화지(畫旨)]⋅[황자구임(黃子久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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