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ㅁ>마>마원  

인쇄 하기  html이나 txt파일로 저장 합니다.  원하시는 곳에 붙여넣기 하세요.  글자 크기 크게 글자 크기 작게
- 마원(馬遠) -

- 생몰년 : 1160/1165?~1225
- 국    가 : 중국


馬遠 1160/1165?~1225

중국 남송(南宋, 1127~1279)의 화가.

자(字)는 요부(遙父), 호(號)는 흠산(欽山).

민간에서 불상(佛像)을 그리던 마씨(馬氏) 집안의 후손으로, 산시성(山西省) 윈청현(運城縣) 허중(河中) 융지(永濟)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마분(馬賁)은 북송(北宋, 960~1126) 말기 철종(哲宗, 1077~1100, 중국 북송의 제7대 황제. 재위 1085~1100) 때의 널리 알려진 화가로 흰 원숭이, 흰 사슴, 흰 소 등을 잘 그려서 휘종(637) 때 화원(畫院)의 대조(待詔)를 지냈다.

할아버지 마흥조(馬興祖)는 산수(山水)⋅화조(花鳥)⋅인물 등을 잘 그렸고, 그림 감별(鑑別)에 뛰어났다. 큰아버지 마공현(馬公顯)과 아버지 마세영(馬世榮)도 모두 고종[高宗, 1107~1187, 중국 남송의 초대 황제. 헌황제(憲皇帝). 재위 1127~1162] 때 화원 대조를 지냈다. 형 마규(馬逵)도 화조도로 널리 알려졌으며, 아들 마인(164)에 이르기까지 7명의 화원(畫院) 화가를 배출한 화단(畫壇)의 명족(名族)이다.

마원은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나서 광종[光宗, 1147~1200, 중국 남송의 제3대 황제. 자황제(慈皇帝). 재위 1189~1194]⋅영종[寧宗, 1168~1224, 중국 남송의 제4대 황제. 공황제(恭皇帝). 재위 1194/1195~1224/1225] 때 화원 대조가 되었다.

가학(家學)을 전하는 한편, 스스로 한 기치(旗幟)를 세우고 산수⋅인물⋅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났다. 그의 산수화는 이당(400)의 화풍(畫風)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으로, 부벽준[斧劈皴, 산수화에서 도끼로 찍은 듯한 자국을 남겨 표현하는 동양화 준법. 뾰족하고 험악한 바위의 표면이나 깎아지른 산의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할 때 쓰는 방법]으로 험하고 깎아 세운 듯한 돌산을 잘 그렸으며, 수묵화(水墨畫)는 붓놀림이 간결하면서도 다양하여 풍경을 표현하는 데 뛰어났다.

산수화는 붓을 대기를 엄정히 하고, 초묵(焦墨, 가장 짙은 묵색으로 화면에서 특히 강조할 부분이나 심오한 부분을 강조할 때 쓴다.)을 사용하여 수석(樹石)을 만들고, 지엽(枝葉)은 구륵(鉤勒, 윤곽을 가늘고 엷은 쌍선으로 묶어서 그리고 그 안을 채색하는 기법)으로 그리고, 암석(岩石)은 방경(方硬)⋅부벽준을 써서, 널찍한 풍경을 그려 내는 일은 드물었으며,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의 꼭대기와 절벽의 각부(脚部)를 나타내지 않고 가까운 곳의 산의 하늘까지 닿았으며, 먼 곳의 산이 오히려 낮아서 ‘변각(邊角)의 경(景)’⋅‘잔산잉수(殘山剩水)’라고 말하여 그 자신이 ‘마일각(馬一角)’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그의 그림은 변각 구도를 주조(主潮)로 한다. 그림 속의 경치와 인물은 자연스럽고 생동적이며 시적(詩的)인 운치가 있는 ‘수도(水圖)’는 각각 다른 선(線)으로 다른 조건하의 각종 물줄기를 묘사하여 사실 묘사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음을 보여 준다.

그의 진필(眞筆)이라는 확증이 있는 작품은 없으나, 정가당(靜嘉堂)의 [우중산수도(雨中山水圖)]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당을 스승으로 하여 배웠다고는 하지만, 가학에 의한 화풍 형성의 성과가 현저하여, 화원 화가 중 독보적인 존재였다.

자연의 자태를 묘사한 이당과는 달리, 사실(寫實)을 바탕으로 하여 산수의 한 부분을 잡아 내어 화면에 일종의 형식을 구성함으로써 정취를 빚어 낼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래서 구도는 긴밀하게 되고 묘사 기법은 간결하게 정리되어 윤곽선(輪郭線)이 강조되었다.

유송년(370)⋅이당⋅하규(585) 등과 함께 이른바 ‘남송 4대 산수화가’라고 일컬어지고, 하규와 더불어 남송 후반기의 원체(院體) 산수화를 대표하며, 마하파(馬夏派)의 기틀을 형성하는 중국 산수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화풍은 원(元)나라(1271~1368)의 손군택(253)을 비롯하여 원⋅명대(明代)에 후계자들이 많고, 외국에까지 전해져 그 곳 한화(漢畫)의 형성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양황후(楊皇后, 영종의 황후)의 제자(題字)가 있어 황실의 깊은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신 마인(臣馬麟)’의 낙관(落款)이 있으며, 1254년작으로 추정되는 [석양산수도(夕陽山水圖)], 그의 작품으로 전하여 오는 [대월도(待月圖)]⋅[매죽산잡도(梅竹山雜圖)](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臺北國立古宮博物館>)⋅[매화소금도(梅花小禽圖)]⋅[산경춘행도(山景春行圖)](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설탄쌍로(雪灘雙鷺)](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조춘도(早春圖)](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추강어은도(秋江漁隱圖)](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가 있다. 그러나 원대(元代)로 들어갈 무렵에는 마씨(馬氏)의 화풍은 점차 형식화되어 가는 징후를 보였다.

아들 마인은 이종[理宗, 1205~1264, 중국 남송의 제5대 황제. 안황제(安皇帝). 재위 1225~1264] 때 화원 지후(祗侯)를 지냈고, 가학을 잘 전하였으나 아버지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마원은 아들을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그림에 자주 그의 이름을 쓰게 하고 가필(加筆)을 해 주었다.

상위  이전  다음


제작 : 동방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