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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불(米芾) -

- 생몰년 : 1051~1107
- 국    가 : 중국


米芾 1051~1107

중국 북송(北宋, 960~1126)의 서예가이며 화가.

자(字)는 원장(元章), 호(號)는 남궁(南宮)⋅해악외사(海嶽外史)⋅양양만사(襄陽漫士).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의 고위 관리(官吏)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허난성(河南省) 화이양(淮陽)에서 죽었다.

어릴 때에는 어머니가 영종(英宗, ?~1068, 중국 북송의 제5대 황제. 재위 1063~1068)의 유모(乳母)였기 때문에 궁정(宮廷)에서 왕족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자라났다.

소년 시절에 조숙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서예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관리를 양성하기 위하여 마련된 정식 수업을 싫어하였지만, 학문적인 논의를 재빨리 이해함으로써 예민한 지성(知性)을 보여 주었다. 또한 재미있고 독창적인 시에 소질을 보였고, 그림과 서예에 뛰어난 능력을 나타냈다.

나중에 벼슬길에 올랐는데, 집안 배경도 있었지만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고 자리를 자주 바꾸어 경력이 다채로웠다. 처음에 황실 도서관에서 책을 교정하는 벼슬에 올랐고, 그 뒤 수도(首都) 카이펑(開封)을 떠나 세 군데나 자리를 옮겼다.

1103년 철학 박사가 되었고, 안후이성(安徽省) 우웨이(無爲)에서 잠시 군사령관으로 일하였다.

1104년 카이펑으로 돌아와 서화학 박사(書畫學博士)로 일하였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황제에게 아들 미우인(191)이 그린 그림을 선물하였다.

그 뒤 정2품 벼슬인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의 자리에 앉았다가 마지막으로 허난성 화이양의 군사령관이 되었는데, 이 자리에 있을 때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쑤성(江蘇省) 단투(丹徒)에 묻혔고, 미우인이 쓴 묘비명(墓碑銘)에는 출세하지 못한 이유를 ‘세상 앞에서 굽실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5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두었는데, 아들 중에서는 첫째와 둘째만 살아남고 나머지 3명은 어려서 죽었다.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기행(奇行)이 심한 별난 성격으로, 관리 생활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이런 색다른 성격 탓이기도 하였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고, 주요한 두 정치 파벌의 지도자였던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중국 북송의 정치가이며 시인⋅문필가)도 그의 동무였다.

이런 꼿꼿한 자존심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예는 예술품 수집가에 대한 태도이다. 그는 예술품 수집가를 참견쟁이와 감정가(鑑定家)의 두 부류로 나누어 참견쟁이는 무식하고 그저 자기 이름을 알리는 일에만 열심이라고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작업은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적인 기질이 뚜렷하다. 이러한 기질은 까다로운 결벽증, 고대 중국 왕조의 의복에 대한 취미, 색다른 돌과 벼룻돌을 좋아하여 열심히 수집한 것 등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

북송 말의 회화 사상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화사(畫史)] 외에도 광범위한 글, 즉 시와 미학(美學)의 역사에 대한 논문, 화론(畫論) 등을 썼는데, 오늘날에도 상당한 양이 남아 있다. 시집 [산림집(山林集)]은 전해지지 않지만, 자기가 갖고 있는 서예 작품을 비판적으로 설명한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과 자기와 남들이 가지고 있던 그림, 미학의 역사에 대한 논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글씨에서는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중국 북송의 시인이며 정치가. 소식(蘇軾)]⋅채양(蔡襄, 1012~1060, 중국 북송의 정치가이며 서예가)⋅황정견(630) 등과 더불어 ‘북송 4대가(四大家)’로 불리며, 왕희지(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의 서예가)의 서풍(書風)을 이었다.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난해하거나 화려한 서체(書體)를 거부하고, 과거의 중국 서예가들을 널리 끈기 있게 연구하였다. 서예 이론서 [서사(書史)]와 [해악명언(海岳名言)](죽은 뒤에 발간되었다.)에는 서예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이 실려 있는데, 이 책을 보면 자체적인 창조적 역량으로 가득 찬 과거의 서체를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움과 자기 표현을 높이 평가하였고, 부자연스럽고 달콤한 것을 기피하였다.

산수화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수묵화(水墨畫)뿐 아니라 문장⋅서(書)⋅시(詩)⋅고미술 일반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고, 소동파⋅황정견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거연(26)⋅동원(155) 등의 화풍(畫風)을 배웠으며, [솟아오르는 구름의 탑(Tower of the Rising Clouds)](워싱턴 프리어 미술관<Freer Gallery of Art, Washington D.C.>)을 비롯한 그림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다. 송대(宋代) 이전 중국의 산수화는 본질적으로 선(線)에 의존하여 대상을 묘사하였다.

허난성 호수 지역의 안개 낀 강과 언덕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지나칠 만큼 묽은 물감을 이용하여 결이 뚜렷이 나타나도록 수평으로 붓을 놀리는 기법을 도입하였다.

강남의 운연(雲煙)어린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기 위하여 미점법[米點法, 미불과 그의 아들 미우인이 창안하였다고 전해지는 미법 산수(米法山水)의 한 기법]이라는 독자적인 점묘화법(點描畵法, pointillism)을 창시하여, 예찬(315)⋅오진(327)⋅왕몽(341)⋅황공망(620) 등 이른바 ‘원말 4대가(元末四大家)’와 오파(吳派, 중국 명나라의 회화 유파. 북종화계의 절파에 대하여, 남종화계 화가를 말한다.)에게 그 기법을 전하였다.

강남화(江南畫)라고도 하는 이 기법은 중국에서 비가 많이 내리고 구름이 가득한 강남 지방의 인상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춘산서송도(春山瑞松圖)](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臺北國立古宮博物館>) 등 먹물이 번져서 퍼지게 하는 이 ‘발묵(潑墨)’ 기법은 당시 사람들의 열광적인 관심을 끌었고, 중국 회화 역사를 통하여 줄곧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아들 미우인에 이르러 성립된 이 일파의 화풍을 ‘미법 산수’라고 한다.

죽은 뒤에 나온 작품집 [보진영광집(寶晉英光集)]⋅[해악제발(海嶽題跋)] 등이 있고, [초서 9첩(草書九帖)]⋅[행서 삼첩(行書三帖)]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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