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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근(朴壽根) -

- 생몰년 : 1914~1965
- 국    가 : 한국


朴壽根 1914. 2. 2.~1965. 5. 6.

한국의 화가.

3대 독자(獨子)인 박형지(朴亨智)의 아들로, 강원도 양구(楊口)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서 죽었다.

처음에는 비교적 유복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프랑스의 화가)를 동경(憧憬)하고 그와 같은 작가가 되기를 염원하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양구 보통 학교(楊口普通學校)를 겨우 마친 뒤, 독학(獨學)으로 미술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농촌의 여러 풍경을 그렸다. 독학으로 익힌 탄탄한 조형법은 뒷날 현대 한국 미술의 한 전형(典型)을 세운 화가라는 평가의 밑받침이 되었다.

1932년 18세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화단(畫壇)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과 파산한 아버지의 금강산(金剛山) 입산 등으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20대 초반의 어려움은 예술 세계의 기초를 다지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각 지방을 떠돌면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려 선전(鮮展) 등에 출품하였다.

1940년에는 장이석(502)⋅최영림(578)⋅황유엽(626) 등과 주호회(珠壺會)를 결성하고, 그 뒤 5년 동안 동인전(同人展)을 열었다.

광복 직후에는 평안 남도 도청(道廳) 서기직(書記職)을 그만두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금성(金城)에서 중학교 미술 교사로 일하였다. 6⋅25 전쟁 때는 몇 번의 위기를 넘기면서 부두 노동자 등으로 살아갔다. 전쟁이 끝난 뒤 서울 종로구 창신동(昌新洞) 판자촌에 자리잡고 미8군 피엑스(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하였다.

1953년 제2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에서 특선하고, 대한 미술 협회[大韓美術協會, 미협(美協)] 전람회에서도 입상하였다.

1954년 전업 작가로 변신한 뒤 다시 생활고(生活苦)로 허덕였으나, 작품 세계는 독특한 양식이 정립되었다. 단순 명료한 소재와 구도, 특히 한국적인 분위기의 화면 효과는 외국인 애호가의 눈길을 끌었다.

한때 국전(國展)에서 낙선하여 방황하였으며, 특히 극심한 생활고로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이 때 몇몇 외국인들의 눈에 든 작품이 팔려 가까스로 생활하였다.

1958년 이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Worldhouse Gallery, New York), [조선 일보(朝鮮日報)] 초대전, 마닐라(Manila)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59년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1962년 제11회 때는 심사 위원이 되었다.

말년에는 건강까지 악화되고 백내장까지 걸렸으나 수술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어 한쪽 눈을 잃었다. 그 뒤 간경화와 응혈증으로 51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은 지 10여 년 뒤부터 미술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남아 있는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그림에는 꾸밈없는 생활 속의 시골 사람이 등장한다. 행상이나 빨래터 또는 절구질하는 아낙네가 주로 등장하고 담소를 즐기는 노인이나 놀이에 빠진 어린이도 즐겨 그렸다.

상당수의 화가들이 서구적 분위기의 귀부인이나 유한(有閑) 취미 속의 고급스러운 인물을 선택할 때 그는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았다. 이 같은 인물은 거짓 없는 한국인의 한 전형으로 화면에 묘사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자연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裸木)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공간감을 무시하고 대상을 평면화시켜 이 소재를 극도로 단순 명료한 형태로 응축하였다. 절제된 선묘(線描)는 결코 허장성세(虛張聲勢)에 의한 과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극도로 추상화되어 본질을 은폐시키지도 않았다. 절제의 미를 체질적으로 화면에 옮겨 민족 정서를 그려 냈다.

특히 화면 바탕의 처리 방식이 독특하여 두툼한 질감(質感)을 느끼게 하였는데,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의 표면처럼 우툴두툴한 효과를 냈다. 마치 오랜 풍상(風霜)에 시달린 마애불상(磨崖佛像)처럼 형상이 바탕의 매체에 깊이 스며 일체감을 이룬 자연성을 느끼게 하였다.

또 회색 등 무채색 계열을 기조색으로 삼고 있어 한결 깊이 있고 무게가 있는 듯한 장엄미도 배어 있다. 원색에 의한 화려함을 거부하고 질박한 색채와 표면 질감(質感)으로 견고함을 이루어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가졌다. 오랜 잔향(殘響)이 남게 되는 그의 화폭은 한국인의 정서와 잘 맞아 부담감 없는 조형적 호소력을 가졌다.

회색조의 두툼한 질감 위에 평범한 인물과 주변 풍경이 간결하고 담담한 단순 구도로 압축되어 있다. 이 때문에 1950년대 이후 이중섭(467)과 쌍벽(雙璧)을 이룬 작가로 평가된다. 이중섭이 분방한 선묘에 다양한 색채를 구사(驅使)하였다면, 박수근은 최대한 절제된 화면 효과를 추구하였다. 두 사람 모두 민족 회화의 구현이라는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하였지만, 박수근은 보다 규모 있는 대작으로 일관된 조형 논리를 전개시킨 특징을 보인다.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한국미(韓國美)의 전형을 이룩하여, 광복 이후 최고의 유화(油畫) 화가로 평가받았다.

2005년 10월, 이중섭의 작품(994점)과 함께 그의 그림 1,746점이 미술계 사상 최대의 위작(僞作) 시비(是非)를 불러일으켰다.

‘박수근 미술관’이 있는 강원도 양구 정림리에 그의 이름을 딴 ‘박수근 마을’이 있으며, 2006년 11월 19일에는 2,800평 규모의 예술인촌이 문을 열었다.

작품으로 [농악(農樂)](1932년)⋅[우물가](1953년, 개인 소장)⋅[빨래터](1954년, 개인 소장)⋅[유동(遊瞳)](1957년)⋅[나무와 여인](1962년, 96×161cm)⋅[노상(路上)](1962년, 30×13cm)⋅[소와 아이들](1962년, 경기도 과천 호암 미술관)⋅[소와 유동](1962년)⋅[고목(古木)과 여인](1964년, 개인 소장)⋅[할아버지와 손자](1964년)⋅[행인(行人)](1964년, 홍익 대학교 박물관)⋅[시장의 여인들](1962년대, 22×28c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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