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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운성(裵雲成) -

- 생몰년 : 1900~1978
- 국    가 : 한국


裵雲成 1900. 7. 13.~1978. 9. 20.

한국의 화가.

서울 종로구 명륜동(明倫洞)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校)를 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1922년 독일에 유학하여 베를린 미술 학교(Universität der Kunste Berlin)를 졸업한 뒤, 18년 동안 베를린과 파리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27년 파리의 살롱 도톤(Salon d’Automne,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프랑스 미술 전시회. 가을 살롱 또는 가을전)에 목판화(木版畫) [자화상(自畵像)]이 입선하였고, 이 무렵 목판화 [올림픽](1928년), 유화(油畫) [나의 고향](1931년) 등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폴란드의 바르샤바(Warszawa) 국제 목판화전에서 1등상을 받았다.

베를린과 함부르크(Hamburg)에서 개인전(1935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Praha)에서 개인전(1936년)을 가졌고, 1937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였다.

르 살롱[le Salon, 프랑스 미술가전(展)이라는 의미의 관선 미전(官選美展). 살롱 데 자르티스트 프랑세(Salon des Artistes Français)라고 한다.]에도 유화⋅소묘(素描)⋅목판화 출품하였고, 1938년에는 특별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같은 해, 파리의 샤르팡티에(Charpentier)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그 밖에 여러 전람회에 참가하였다.

유채(油彩)를 쓰면서도 주로 목판에 동양의 모필로 부드럽고 유연한 표현 효과를 냈고, 한복의 모녀상 또는 한국의 전통적 무악(舞樂) 광경 등을 주제로 하여 유럽에서 각별한 평가를 받았다.

2차 대전(1939~1945년)이 일어나 1940년 9월 서울로 돌아왔으며, 1944년 6월 귀국 작품전을 가졌다. 한때 일제(日帝)의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정략에 이용당하기도 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에 좌익(左翼) 계열의 보도 연맹(保導聯盟, 1949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 단체로, 정식 명칭은 ‘국민 보도 연맹’)에 가입하였다.

1948년 국내에서 제작한 풍경화와 풍속화로 개인전을 가졌고, 그 해 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에 창설된 미술과의 초대 학과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경주(慶州) 미술 학교 명예 교장을 지내면서 진보적인 미술 활동을 펼쳤다.

1949년 제1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 서양화부 추천 작가 및 심사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성화(聖畫) [성호(聖護)]를 출품하였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전후에 월북(越北)하여 평양 미술 대학교(平壤美術大學校) 교수로 재직하였고, 조선 미술가 동맹(朝鮮美術家同盟) 미술가로 활동하였다.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은 주로 판화에 치중하였다.

작품은 풍속을 주제로 하여 소박하고 친근하며, 민족적인 정서가 바탕에 짙게 깔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생 동안 300여 점의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많은 작품이 독일과 프랑스 등에 전시되어 있다.

작품으로 [해금강 총석정(海金剛叢石亭)](1940년쯤), 판화 [나들이](1955년)⋅[널뛰기](1958년)⋅[제기차기](1961년)⋅[우리의 자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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