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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위(申緯) -

- 생몰년 : 1769~1845
- 국    가 : 한국


申緯 1769(영조 45)~1845(헌종 11)

조선(朝鮮, 1392~1910)의 문신(文臣)이며 시인⋅서화가.

자(字)는 한수(漢叟), 호(號)는 자하(紫霞)⋅경수당(警修堂), 본관(本貫)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대사헌(大司憲) 신대승(申大升, 1731∼1795)이며,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 1777~?)의 딸이다.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나서 14세 때 정조(定祖, 1752~1800, 조선의 제22대 왕. 재위 1777~1800)가 궁중에 불러들여 칭찬을 하였다.

1799년(정조 23년)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었다.

1812년(순조 12년) 진주 겸 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청(淸)나라(1616~1912)에 갔다. 이 때 중국의 학문과 문학에 대하여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의 학자들과 문인(文人)들과의 교유(交遊)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당대(當代)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중국 청나라의 서예가이며 문학가⋅금석학자)과의 교유는 그의 문학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14년에 병조참지(兵曹參知)를 거쳐, 이듬해 곡산(谷山) 부사(府使)로 나갔다. 이 때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확인하고 농민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조정(朝廷)에 세금을 탕감하여 달라는 탄원을 하였다.

1816년 승지(丞知)를 거쳐 춘천(春川) 부사로 나갔다. 이 때 그 지방의 토호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맞서다가 파직(罷職)까지 당하였다.

1822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나 당쟁(黨爭)의 여파로 다시 파직된 뒤, 곧 복관(復官)되어 1828년에는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윤상도(尹尙度, 1768~1840, 조선의 문신)의 탄핵(彈劾)으로 2년 만에 또다시 물러나 경기도 시흥(始興) 자하산(紫霞山)에서 살았다.

1832년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 생활에 환멸을 느낀 끝에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1833년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어 이에 나아갔으나, 경기 암행 어사 이시원[李是遠, 1790~1866, 조선의 문신이며 의사(義士)]이 강화 유수 때의 실정(失政)을 거론, 상소함으로써 황해도 평산(平山)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復職)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당시 시(詩)⋅서(書)⋅화(畫)의 ‘삼절(三節)’이라고 불리었고,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후세의 시인들도 그의 작시법(作詩法)을 본받았다.

시에 있어 한국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사라져 가는 악부(樂府)를 보존하고자 하였는데, 한역(漢譯)한 소악부(小樂府)와 시사평(詩史評)을 통한 동인론시(東人論詩) 35수와 우리 나라의 관우희(觀優戱)를 읊은 관극시(觀劇詩)가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를 김택영(金澤榮, 1850~1927, 조선의 학자)은 시사적(詩史的)인 위치로 볼 때 500년 이래의 대가(大家)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그의 영향은 강위(姜瑋, 1820~1884, 조선의 시인이며 한문학자⋅개화 사상가)⋅이건창(李建昌, 1852~1898, 조선의 문신이며 대문장가)⋅황현(黃玹, 1855~1910, 조선의 순국 지사이며 시인⋅학자)⋅김택영으로 이어져 우리 나라의 한문학을 마무리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서얼 차대(庶孼差待)의 폐지, 붕당(朋黨) 정치의 배격 등을 시로 읊었다.

그림은 산수화와 묵죽(墨竹)에 능하였는데,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文人畫家)이며 이론가인 강세황(20)에게 묵죽을 배웠으며, 남종화(南宗畫)의 기법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남종화의 꽃을 피웠다. 그의 묵죽화풍은 아들 신명준(申命準, 1803~1842, 조선의 선비 화가)⋅신명연(271)을 비롯하여, 조희룡(554)등 추사파(秋史派)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유덕장(368)⋅이정(457)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또한 신경(神境)에 이른 필법(筆法)은 명(明)나라(1368~1644)의 문인화가(文人畫家) 동기창(153)체(體)를 따랐으며, 조선 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하였다.

지은 책으로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분여록(焚餘錄)]⋅[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 등이 있고, 김택영이 600여 수를 정선(精選)한 [자하시집(紫霞詩集)]이 있다. 아들 신명연이 아버지의 유고(遺稿)를 거두어 문집을 엮었다.

작품으로 [묵죽도(墨竹圖)]와 [방대도(訪戴圖)](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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