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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

- 생몰년 : 1797~1858
- 국    가 : 일본


安藤廣重 1797~1858. 10. 12.

일본의 화가.

본명(本名)은 안도 도쿠타로(安德太郞), 아호(雅號)는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 소방대 소방 감독관인 안도 겐에몬(安藤源衛門)의 아들로, 에도에서 태어났으며, 이 곳에서 죽었다.

우키요에[浮世繪,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년)부터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 1603~1867년, 에도 시대) 말기에 서민 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회화의 한 양식. 일반적으로는 목판화(木版畫)를 뜻하며, 그림 내용은 대부분 풍속화이다.] 유파(流派)에 속하는 채색 목판화가이다.

어릴 때부터 스케치를 좋아하였다는 것은 다양한 일화(逸話)에 나타나 있다. 12세 때인 1809년 봄 어머니가 죽었으며, 그 직후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듬해 초 아버지도 죽었다. 소방 감독관으로 실제 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급료도 적었다.

1811년쯤 우키요에의 대가(大家)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 1773~1828) 문하(門下)에 들어간 데는 타고난 예술적 성향과 더불어 이런 요인도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우타가와 도요히로의 수수하고 세련된 취향은 안도 히로시게가 독자적인 화풍(畫風)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안도 히로시게는 풍경 판화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완전히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15세 때 아호와 우키요에 화가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결코 신동(神童)은 아니었기 때문에, 첫 작품이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818년에 이르러서였다.

책의 삽화 형태로 발표된 이 작품에는 ‘이치유사이 히로시게’라는 서명(署名)이 들어 있었다. 서명이 있는 작품 가운데 이보다 앞선 것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문하생 시절에 스승의 화실(畫室)을 위하여 값싼 부채 그림을 그린다거나 하는 잡다한 일을 하였고, 도쿠가와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가노파(狩野派, 중국적인 소재와 기법을 중시하는 일본의 회화 유파)와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적인 시조파(四條派, 寫生에 의한 사실적인 화풍의 화파)의 화풍도 공부하였다. 이 두 유파는 후기 작품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화가로 독립하자마자 가업(家業)인 소방 감독관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림에만 전념하였다.

1832년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에도에서 교토(京都)까지 여행하였다. 가는 길에 53개 역참(驛站)에서 하룻밤씩 묵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스케치하였다. 같은 해에 55점의 풍경 판화(도카이도의 시발점과 종착점 및 각 역참마다 한 점씩)로 이루어진 연작(聯作) 판화 [도카이도 53역참(東海道五十三次)](1833~1834년)를 발표하였다. 이 연작 판화는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우키요에 화가 가운데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나중에 일본의 다른 지방을 여행하여 [기소 가도 69역참(木會街道六十九次)]⋅[도토 명소(東都名所)]⋅[비와호 8경(琵琶湖八景)](1835년)⋅[에도 교외 8경(江戶郊八景)]⋅[오미 8경(近江八景)]을 묘사한 연작 판화를 발표하였고, 또한 이전에 해 놓았던 스케치를 이용하여 도카이도 53경의 새로운 작품을 되풀이하여 제작하였다.

서민적인 우키요에 화가들처럼 초기 경력을 알려 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몇 단계로 나누어 특징지을 수 있다.

첫 단계는 1811~1830년쯤의 문하생 시절이다. 이 때 주로 선배들의 작품을 모방하여 젊은 여인⋅배우⋅무사(武士)와 같은 인물 판화를 제작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1830~1844년쯤의 초기 풍경화 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풍경화와 화조(花鳥) 판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이상형(理想型)을 창조하였는데, 이 이상형은 [도카이도 53역참]과 풍경을 묘사한 그 밖의 연작 판화에서 구현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1844~1858년의 후기 풍경화 시대이다. 순수한 풍경 및 인물이 있는 풍경을 주로 그린 이 시기에는 지나친 인기 의식과 다작(多作)으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말년의 작품은 점점 질이 떨어졌는데, 그것은 주로 출판업자의 지나친 요구와 자신의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다.

일반인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5,000점이 넘는 판화를 제작하였고, 목판화 중 일부는 1만 부나 복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사하고자 하는 광경의 본질을 포착하여 몇 개의 단순하고 고도로 장식적인 요소로 변형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갖고 있었던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의 본질을 포착하여 그것을 놀랄 만큼 효과적인 구도로 전환시켰다.

눈⋅비⋅안개⋅달밤의 풍경은 일본의 통속화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온화하고 시적(詩的)인 독특한 풍경화를 창조, 풍경 판화를 독자적 장르로 통합⋅정리하였고,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을 처음으로 일반인도 쉽게 음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하였다.

초기 동시대인인 가쓰시카 호쿠사이(11)는 순수한 풍경 판화의 혁신자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안도 히로시게는 가쓰시카 호쿠사이만큼 뚜렷한 개성으로 그에 버금가는 걸작을 많이 완성하였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접근 방식은 안도 히로시게보다 힘차고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적이며, 다양한 표현 양식을 광범위하면서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안도 히로시게는 이러한 훈련이 다소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이제까지 이 화파(畫派)의 어느 화가도 이루지 못한 인간적인 감촉이 있었다. 그의 그림은 지금까지 자연의 경이를 거의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친밀해지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여행과 포도주를 좋아하고 미식가였으나, 그 밖의 취향에서는 진정한 에도 시민이었다.

콜레라가 한창일 때 병에 걸려 죽었는데, 유언장에 옛날의 에도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는 고시(古詩) 한 편을 인용함으로써 분에 넘치는 장례식을 삼가라는 뜻을 가족에게 남겼다. ‘내가 죽거든/불태우지 말고 땅에 묻지도 말라./그저 들판에 내던져/굶주린 개들의 배를/채우게 하라.’

이 시에 다음과 같은 시구를 작별의 말로 덧붙였다. ‘붓을 에도에 남겨 두고/새로운 여행을 떠나노라./천국의 모든 명소를/샅샅이 구경하고 싶구나!’

풍경화 구성에 대한 그의 천재성을 서양에서 맨 처음 인정해 준 것은 인상파(印象派, impressionism)와 후기 인상파(後期印象派, postimpressionism) 화가들이었다. 19세기 말 일본 목판화가 유럽에서 재발견되었을 때, 고갱(Eugène-Henri-Paul Gauguin, 1848~1903,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네덜란드의 화가)⋅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프랑스의 화가)⋅세잔(Paul Cézanne, 1839~1906, 프랑스의 화가)⋅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미국의 화가) 같은 서양화가들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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