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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순(尹喜淳) -

- 생몰년 : 1906~1947
- 국    가 : 한국


尹喜淳 1906~1947. 4.

한국의 서양화가이며 미술 평론가.

호(號)는 범이(凡以).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 곳에서 죽었다.

휘문 고등 보통 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지금의 휘문 중⋅고등 학교)를 거쳐 경성 사범 학교(京城師範學校)를 졸업한 뒤, 서울 주교 공립 보통 학교(舟橋公立普通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독학(獨學)으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27년 제6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출품, 1937년 제16회에 이르기까지 4차례에 걸쳐 입선하였으며, 제9회(1930년) 선전(鮮展)에서는 [황의소녀(黃衣少女)]로 특선을 차지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로 1918년 창립된 순수 근대 미술 동인회(同人會)인 서화 협회(書畫協會) 전람회(協展)에도 참가하였다.

화풍(畫風)은 안정된 구도에 사실적(寫實的)인 묘사의 인물화와 정물화가 주를 이루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매일 신보(每日申報)] 학예부 기자로 [매일 신보] 연재 소설의 삽화를 그려, 휘문 고등 보통 학교 선배였던 이승만(433)과 함께 삽화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서양화가보다는 미술 평론가로서 더 두드러졌다. 1930년 [매일 신보]에 [제19회 서화 협회전을 보고]를 발표한 뒤로 신문과 잡지에 선전평(鮮展評)을 비롯한 전시평과 당대(當代) 미술계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으며, 특히 [조선 미술계의 당면 과제]([신동아], 1932년 6월)에서는 민족 미술을 수립하려면 올바른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현실과 생활에 기초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미술계가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제시하였다.

1937년 이후로는 미술 평론과 한국 미술사(美術史) 연구에만 전념하였으나, 일제(日帝) 말기에는 친일 단체인 조선 남화 연맹(朝鮮南畫聯盟)에 참가하는 굴곡도 보였다.

1940년부터는 [매일 신보] 학예부 기자로 미술전의 평을 전담하였다.

광복된 뒤에는 [매일 신보]를 이은 [서울 신문] 자치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 미술 협회(朝鮮美術協會)를 탈퇴하였던 사람들로 구성된 진보 미술 단체인 조선 조형 예술 동맹(朝鮮造形藝術同盟) 위원장을 맡았고, 이어 진보적인 미술 단체들이 통합한 조선 미술 동맹(朝鮮美術同盟) 위원장 및 미술 평론부 위원 등을 지내면서 진보적인 민족 미술 건설을 강력히 제창하였다.

민족 미술 전통을 이해하고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는 방향을 모색한 시론(時論)을 모아 [조선 미술사 연구](1946년)을 펴냈고, 1947년 폐결핵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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