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ㅇ>이>이마동  

인쇄 하기  html이나 txt파일로 저장 합니다.  원하시는 곳에 붙여넣기 하세요.  글자 크기 크게 글자 크기 작게
- 이마동(李馬銅) -

- 생몰년 : 1906~1980
- 국    가 : 한국


李馬銅 1906~1980

한국의 서양화가.

충청 남도 아산(牙山)에서 태어났다.

호(號)는 청구(靑駒).

1921년 휘문 고등 보통 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지금의 휘문 중⋅고등 학교)에 입학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 학생으로 일본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양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고희동(37)에게 그림 지도를 받았다.

1927년 일본 도쿄 미술 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고, 1928년 제7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서 입선하였으며,제11회(1932년) 때에는 특선하였다.

실내 정물(靜物)⋅인물 등의 초기 작품은 단단한 화면 구성에 힘찬 필치가 특징이며, 약간 어두운 색조를 배경으로 사실적(寫實的)으로 묘사된 사물⋅인체는 밝은 빛을 내면서 견고하게 구축된 느낌을 준다.

1931년 도쿄에서 구본웅(47)⋅김응진(金應進) 등과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였으며, 1932년 도쿄 미술 학교를 졸업한 뒤, 1933년 [동아 일보(東亞日報)] 기자가 되었다.

1934년에는 목일회(牧日會)를 결성하여, 그 해 서울 종로(鐘路)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에서 제1회 작품전을 열었다. 목일회는 당시 정부 주도로 아카데미즘을 구축해 가던 선전(鮮展)의 보수성에 저항하여, 개성 있는 서양화가들이 민족 미술의 뜻을 펴려고 만든 단체였다. 그러나 단체의 이름이 일본을 배격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사용 금지당함에 따라 모임이 해체된 상태였다가, 1937년 이름을 목시회(牧時會)로 바꾸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회원은 이마동을 비롯하여 구본웅⋅길진섭(60)⋅김용준(86)⋅백남순(211)⋅송병돈(宋秉敦, 1902~1967, 한국의 화가)⋅신홍휴(申鴻休, 1911~1961, 한국의 화가)⋅이병규(412)⋅이종우(464)⋅임용련(486)⋅장발(495)⋅황술조(623) 등 주로 도쿄 미술 학교 출신이었다. 그림의 성향은 대개 일본 양화의 기법을 따르는 보편적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와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범주였으나, 파리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순수주의(純粹主義, purisme) 사조(思潮)를 따르는 야수파(野獸派, fauvisme<Wild Beasts>)적인 표현이나 과감한 반전통적 방법을 시도하는 성향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사회적 배경과 양화에 대한 인식의 저하를 극복하지 못하고,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단체였던 목시회는 1938년 ‘9인 양화 동인전’을 끝으로 활동을 마감하였다.

그의 민족 의식은 1935년 선전에 출품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1937년 목시회 동인전을 새로 시작할 때 역시 참가하였으며, 민족적인 미술 단체인 서화 협회(書畫協會) 전람회(協展)에 출품하였다.

1939~1951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교사로 일하다가 교감을 지냈다.

1953년 제2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부터 제18회(1969년)까지 추천 작가⋅초대 작가⋅심사 위원을 지냈고, 여러 차례 심사 위원장을 맡아 보았다.

1956년 대한 미술 협회(大韓美術協會, 美協)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58년에는 목우회(木友會)를 창립하여 회장을 맡았다.

1962년 홍익 공예 고등 전문 학교(弘益工藝高等專門學校) 교장에 취임하고, 1963년 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 미술 대학장이 되었다.

1971년 정년 퇴직과 동시에 홍익 대학교 명예 교수가 되었으며, 1971~1972년 한국 미술가 협회(韓國美術家協會)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문화 예술 진흥원(文化藝術振興院) 이사에 임명되었으며, 1975년 한중 예술 협회(韓中藝術協會) 회화 분과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38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7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고, 미술 교육 등 미술 문화 발전에 끼친 공로로 서울 특별시 문화상⋅국민 훈장 모란장⋅문화 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그는 사실적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에 충실한 풍경화를 즐겨 다루었는데, 화풍(畫風)의 변화가 대체로 1960년을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진다.

1960년 이전의 전기(前期)에는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에 기반을 두고 정확한 소묘(素描)와 건실한 색감을 바탕으로 하는 화풍을 구사(驅使)하였으며, 후기에는 페인팅 나이프의 짧은 수직선들이 화면을 점진적으로 뒤덮는 일종의 인상파(印象派, impressionism)적 점묘화법(點描畵法, pointillism)을 통하여 화려한 색감의 화풍을 보여 주었다.

지은 책으로 [고등 미술]이 있으며, 작품으로 [남자(男子)](1931년, 87×115cm,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꽃다발 있는 정물(靜物)]⋅[꽃다발 없는 정원](1934년)⋅[교회 보이는 풍경](1966년)⋅[흑석동 풍경](1968년) 등이 있다.

상위  이전  다음


제작 : 동방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