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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李用雨) -

- 생몰년 : 1902~1952
- 국    가 : 한국


李用雨 1902. 7. 1.~1952. 11. 11.

한국의 화가.

호(號)는 춘전(春田)⋅묵로(墨鷺).

대한 제국(大韓帝國, 1897~1910) 때 경시(警視)를 지낸 이종국의 맏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전라 북도 전주(全州)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화재(畫才)에 뛰어났으며, 1911년에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 미술원(畫美術院)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안중식(300)⋅이도영(403)⋅조석진(542) 등에게 배워 산수(山水)⋅화조(花鳥)⋅인물⋅묵란(墨蘭) 등을 잘 그렸다.

1918년 우리 나라 최초로 순수 근대 미술 동인회(同人會)인 서화 협회(書畫協會)가 창립되었을 때 16세의 최연소자로 정회원이 되었고, 18세 때 오일영(325)과 함께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照殿)의 벽화 [봉황도(鳳凰圖)](1920년, 530×180cm) 제작에 참여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고성춘심(古城春深)]을 출품하여 4등상을 받았고, 1932년 제3회 서화 협회 전람회(協展)에 [월야독서(月夜讀書)], 선전(鮮展)에 [실제(失題)]를 출품하였다.

1923년 3월 9일, 당시 20대 전반의 신진 한국화가로 촉망받던 노수현(126)⋅변관식(216)⋅이상범(421)과 함께 전통 회화를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였다. 동연사는 우리 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同人會)로, 이들은 안중식⋅조석진으로부터 배운 전통 회화를 새로운 근대적 사조(思潮)와 감각에 맞게 개혁하기 위하여,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평동(平洞)에 모임 장소를 두고 신구화도(新舊畵道)를 함께 추구하였다. 이들은 또한 동인전의 개최를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1923년 11월 보성 전문 학교[普成專門學校, 고려 대학교(高麗大學校)의 전신]에서 노수현과 이상범의 2인전을 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재정난으로 무산되었으며 동인회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동인회로서의 외형적 활동은 미약하였지만, 새로운 화풍(畫風) 수립의 노력은 동인들 각자를 통하여 추진되어, 향토적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한국 산수화풍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전에는 제3회(1924년) [하일(夏日)], 제4회(1925년) [흙의 향기], 제5회(1926년) [인개(鱗介)], 제6회(1927년) [해(海)], 제7회(1928년) [제7의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협전(協展)에 제5회 이상범⋅이한복(475) 합작 [무녀(舞女)], 제14회 [취우곡병(驟雨曲屛)]을 출품하였다.

32세가 되는 1934년 제13회 선전에 [계산연호(溪山烟湖)], 제18회(1939년)에 [산가(山家)]를 출품하여 특선을 하였다.

1940년 조선 미술관(朝鮮美術館) 주최 산수 풍경화전에 출품하였고, 1942년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49년 제1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 추천 작가와 심사 위원이 되었다.

6⋅25 전쟁 중에 전주로 피란 가던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

화풍은 따뜻한 농촌 풍경을 통하여 한국인의 온화한 심성을 반영하고 있다.

작품으로 [석란도(石蘭圖)]⋅[송학도(松鶴圖)]⋅[시골 풍경]⋅[어해도(魚蟹圖)]⋅[이어도(鯉魚圖)]⋅[제일 강산(第一江山)]⋅[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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