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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성(李仁星) -

- 생몰년 : 1912~1950
- 국    가 : 한국


李仁星 1912. 8. 28.~1950. 11. 4.

한국의 서양화가.

대구(大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서 죽었다.

11세에 대구 수창 공립 보통 학교(壽昌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였고 1925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 아동 미술 전람회에서 특선을 하였다.

보통 학교를 졸업한 뒤, 수채화가 서동진(230)이 운영하던 대구 미술사(大邱美術社)에서 일하며 계속 작품 창작에 힘쓰는 한편, 대구의 한인(韓人) 서양화가 단체 영과회(零科會)에 참여하고, 1930년 서동진이 창립한 향토회(鄕土會) 등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제8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입선한 이래 줄곧 출품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가서 1932년부터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 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서 공부하며 일본의 최대 공모전인 제국 미술전(帝國美術展, 帝展) 및 신문전(新文展)에 입선하였다.

제10회(1931년) 선전(鮮展)부터 연속 6차례 특선하였으며, 제14회(1935년)에서는 [경주(慶州)의 산곡(山谷)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받았고, 같은 해 제전(帝展)에서 준특선, 제16회(1937년)부터는 서양화부의 추천 작가 겸 심사 위원이 되었다.

추천 작가가 된 이후에는 화단(畫壇)의 엘리트로서 그 지위를 굳혀 갔으며, 1938년에는 개인전, 1940년에는 김인승(96)⋅심형구(286)와 함께 ‘추천 작가 3인전(三人展)’을 가졌고, 개인 화실(畫室)을 차려 후배를 양성하고 [해당화(海棠花)](1941년, 145.5×227.3cm,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광복된 뒤에는 이화 여자 고등 학교(梨花女子高等學校) 교사를 지냈고, 1947년 미군정(美軍政)의 강화에 따라 김인승⋅남관(121)⋅이규상(397)⋅이쾌대(471) 등과 정치색이 배제된 조선 미술 문화 협회(朝鮮美術文化協會)를 결성하여 1949년까지 네 차례의 연례 회원전에 참가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 심사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6⋅25 전쟁 중인 39세 때 경찰관과 잘잘못을 가리다가 총기 사고로 죽었다.

1954년 서울의 천일 화랑(天一畫廊)에서 구본웅(47)⋅김중현(103)과 함께 3인 유작전(遺作展)이 열렸다.

작품 경향은 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적 대상 파악보다는 인상파(印象派, impressionism)적인 감각주의(感覺主義, sensualism)에서 이국 취향과 토속적 소재를 발전시켰다.

이 밖의 작품으로 [소녀(少女)](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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