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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상(李麟祥) -

- 생몰년 : 1710~1760
- 국    가 : 한국


李麟祥 1710(숙종 36)~1760(영조 36)

조선(朝鮮, 1392~1910)의 문인(文人)이며 서화가(書畫家).

자(字)는 원령(元靈), 호(號)는 능호관(凌壺觀)⋅보산자(寶山子),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고조부(高祖父)는 인조(仁祖, 1595~1649, 조선의 제16대 왕. 재위 1623~1649)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경여(李敬與, 1585~1657, 조선의 문신)이나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자(庶子)였기 때문에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 없었다.

1735년(영조 11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고, 음보(蔭補)로 한양(漢陽)의 북부 참봉(北部參奉)을 지낸 뒤, 내자시(內資寺) 주부(主簿)와 경상도 사근역(沙斤驛) 찰방(察訪)을 거쳐 1750년 음죽(陰竹) 현감(縣監)이 되었다.

1752년 관찰사(觀察使)와의 불화로 현감직을 사직하고 충청도 단양(丹陽) 음죽현 설성(雪城) 구담(龜潭)에 종강모루(鍾崗茅樓)를 짓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가정 형편이 궁핍하고 몸은 병약하였으나 성격이 고결하고 강직하였으며, 노론(老論)의 입장에서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당대(當代)의 많은 명유(名儒)들과 교유(交遊)하였으며, 그 중에는 김무택(金茂澤)⋅송문흠(宋文欽, 1710~1752, 조선의 서예가)⋅이윤영(448) 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시(詩)⋅서(書)⋅화(畫)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고 불리었고, 그림에는 산수(山水), 글씨에는 전서(篆書)⋅주서(籒書)에 뛰어났으며, 인장(印章)도 잘 새겼다.

20대 초기에는 남종화법(南宗畫法)에 따른 화보(畫譜)나 조영석(545) 등의 화풍(畫風)을 주로 따랐고, 30대 중기에는 금강산(金剛山) 등지의 진경 산수[眞景山水, 우리 나라에 실재하는 산천의 경치 그대로를 직접 보고 그린 산수화로, 정선(522)이 개척하였다.]와 문인들의 아취가 넘치는 청유(淸遊) 또는 시회(詩會)의 장면을 즐겨 그렸다. 40대 후기에는 은일자(隱逸者)의 심회(心懷)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다루었다.

메마른 갈필(渴筆, 붓에 먹물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서 그리는 동양화 묘법)의 선(線)과 차갑고 깔끔한 담채(淡彩)와 선염(渲染, 먹이나 색이 짙고 옅은 단계로 종이에 번지듯 배어나는 화법으로, 붓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이 자아내는 문기(文氣)어린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화풍은 윤제홍(387)과 이윤영 등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 문인화(文人畫)의 일맥을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작품으로 [검선도(劍仙圖)](61.8×96.7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구룡연도(九龍淵圖)](1752년, 58.5×118.2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노송도(老松圖)]⋅[산수도(山水圖)]⋅[설송도(雪松圖)](52.6×117.2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송석도(松石圖)]⋅[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63.2×23.8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개인 소장)⋅[옥류동도(玉流洞圖)]⋅[한림수석도(寒林秀石圖)] 등 60여 점이 전한다.

지은 책으로 [능호집(凌壺集)](모두 2권)이 있고, 글씨에 [대사성 김식표(大司成金湜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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