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년
: 1541~1622
- 국 가
: 한국
李霆 1541(중종 36)~1622(광해군 14)
조선(朝鮮, 1392~1910)의 화가.
자(字)는 중섭(仲燮), 호(號)는 탄은(灘隱),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세종(世宗, 1397~1450, 조선의 제4대 왕. 재위 1419~1450)의 현손(玄孫)으로, 아버지는 익주군(益州君) 이지(李枝)이다.
석양정(石陽正)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석양군(石陽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시(詩)⋅서(書)⋅화(畫)에 뛰어난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았으며, 특히 묵죽화(墨竹畫)에서는 신위
(276)⋅유덕장
(368)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또한 당시 어몽룡
(309)의 묵매(墨梅, 수묵화의 매화), 황집중
(632)의 묵포도(墨葡萄)와 함께 ‘삼절’로 일컬어졌다.
조선의 화단(畫壇)은 도화서(圖畫署)가 중심이 되었으나,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 간에는 묵죽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속에서 소박한 화풍(畫風)으로 그 방면의 독자성을 개척한 작가로서 주목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년, 선조 25~31년) 때 일본군의 칼에 맞아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회복한 뒤 더욱 격조가 높아졌다고 한다.
같은 시대의 최립(崔岦, 1539~1612, 조선의 문인이며 문신)과 허균(許筠, 1569~1618, 조선의 문신이며 문학가)은 그의 묵죽화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寫實性)을 함께 칭송하였으며,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조선의 문신)는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중국 북송의 시인이며 정치가)의 신기(神氣)와 문동
(178)의 자연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평하였다.
그의 묵죽화법은 조선 초기의 세죽(細竹) 경향에서 벗어나 대나무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더 조화되는 모습과 짙은 먹과 옅은 먹의 대나무를 한 화면에 배합하여 거리감⋅공간감의 조성 효과를 내면서 보다 서정적이고 다양한 변화를 부여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다. 사의성(思義性)과 사실성을 융합시킨 이러한 화법(畫法)은 당대(當代)는 물론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작품으로 [난도(蘭圖)]⋅[묵죽도(墨竹圖)](71.5×127.5cm, 서울 간송 미술관, 같은 제목의 또다른 [묵죽도] 2점이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과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다.)⋅[죽도(竹圖)]⋅[청죽보(靑竹譜)](개인 소장)⋅[통죽도(筒竹圖)](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풍죽도(風竹圖)](서울 간송 미술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