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ㅇ>이>이정  

인쇄 하기  html이나 txt파일로 저장 합니다.  원하시는 곳에 붙여넣기 하세요.  글자 크기 크게 글자 크기 작게
- 이정(李楨) -

- 생몰년 : 1578~1607
- 국    가 : 한국


李楨 1578(선조 11)~1607(선조 40)

조선(朝鮮, 1392~1910)의 화가.

자(字)는 공간(公幹), 호(號)는 나와(懶窩)⋅나재(懶齋)⋅나옹(懶翁)⋅설악(雪嶽),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할아버지는 이상좌(423), 아버지는 이숭효(432), 작은아버지는 이흥효(479)로 대대로 종6품 아문(衙門)인 도화서(圖畫署) 화원(畫員)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이상좌는 이배련(李陪連)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인물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작은아버지 이흥효 밑에서 자랐다.

5세 때 저절로 그림을 그릴 줄 알아 스님의 진영(眞影)을 그렸고, 이흥효가 가법(家法)을 가르치니 10세에 이미 대성(大成)하여 10세에 산수(山水)⋅불화(佛畫)⋅인물을 잘 그렸다.

11세 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신여상인(信如上人)을 스승으로 삼아 승려가 되려고 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년, 선조 25~31년)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89년(선조 22년) 장안사(長安寺)를 개축할 때 벽에 산수와 천왕제체(天王諸體)를 그렸으며, 1599년에는 도솔원(兜率院) 미타전(彌陀殿)에 [백의대사도(白衣大士圖)]를 그렸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의 수행 화원으로 활약하였는데, 이 때 중국 명(明)나라(1368~1644)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그린 불화첩(佛畫帖)을 보고 칭찬하며 제문(題文)을 써 주었다. 연대(年代)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최립(崔岦, 1539~1612, 조선의 문인이며 문신)으로부터 시문(詩文)을 배웠으며, 허균(許筠, 1569~1618, 조선의 문신이며 문학가)을 비롯하여 심우영[沈友英, ?~1613, 조선의 명문 서출 자제. 강변칠우(江邊七優)의 한 사람]⋅이경준[李耕俊, ?~1613, 조선의 명문 서출 자제. 강변칠우의 한 사람]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신흠(申欽, 1566~1628, 조선의 문신)⋅이춘영(李春英, 1563~1606, 조선의 문신이며 문장가)과도 교유(交遊)하였다.

가난하여 남에게 기식(寄食)하며 지냈으나 성격이 고매하고 의리가 강하였으며, 좋은 산수를 보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낭만적이었다. 불교에 심취하여 깊은 이해력을 지니고 있었고 승려가 되려고도 하였으나, 술을 매우 좋아하여 과음으로 평양(平壤)에서 30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요절(夭折)하였지만 전하는 작품은 원숙한 솜씨와 세련된 화격(畫格)을 보여 준다. 당시 유행하였던 절파(浙派, 중국 명나라 말기 때 발생한 회화의 한 파) 화풍(畫風)과 전통적인 안견파(安堅派) 화풍, 새로 유입된 남종화(南宗畫)풍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화풍을 구사(驅使)하였다.

그림뿐 아니라 시와 서예에도 능하였고, 허균 등에 의하여 당대(當代) 최고의 화가로 손꼽혔으나 천성이 다소 게을러서 그림을 자주 그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전하는 작품이 당대부터 드물었다.

작품으로 [화원별집(畵院別集)](23×34.5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 실려 있는 [산수도(山水圖)](21.7×29.5cm) 등과 [산수화첩(山水畫帖)](모두 12폭, 23.5×19.1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 등이 있다.

상위  이전  다음


제작 : 동방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