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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李仲燮) -

- 생몰년 : 1916~1956
- 국    가 : 한국


李仲燮 1916. 4. 10.~1956. 9. 6.

한국의 서양화가.

호(號)는 대향(大鄕).

아버지 이희주(李熙周)와 어머니 안악 이씨(安岳李氏)의 3남매 중 막내로, 평안 남도 평원군(平原郡) 조운면 송천리(지금은 평양 시내)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서대문(西大門) 적십자 병원(赤十字病院)에서 죽었다.

아버지는 대지주(大地主) 집안, 어머니는 평양(平壤)의 민족 자본가 집안이었다.

1920년 4세 무렵, 이중섭이 태어날 때부터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었고 12년 위인 형 이중석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였으므로 이중섭은 어머니와 형수의 보살핌을 함께 받으며 자랐다.

마을 서당에서 배우다가, 1923년 7세 때 평양 대동문(大同門) 근처 이문리(里門里)에 있던 외갓집에서 살며 종로 공립 보통 학교(鐘路公立普通學校)를 다녔다.

고학년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상당한 수준을 나타내, 학교에서 그림이라면 단연 그를 꼽을 정도였다. 6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김병기(金秉騏, 1916~, 한국의 추상화가)의 집에 자주 가서 그의 아버지 김찬영(104)의 화구(畫具)와 미술 서적들을 구경하였다. 고희동(37)⋅김관호(63)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한 김찬영은 1926년부터 1929년 무렵까지 활발하였던 평양의 소성 미술 연구소(塑星美術硏究所, 소성회)를 이끌었으므로 이중섭에게 자극과 영향을 준 바가 컸다.

1929년(13세) 종로 공립 보통 학교를 졸업한 뒤 평안 북도 정주(定州)의 오산 고등 보통 학교(五山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여 하숙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술부에 가입하였고 여기에서 문학수(184)를 만났다. 2학년 초에 팔이 부러져 1년 동안 휴학하였다.

1931년(15세) 오산 학교에 복학한 직후, 도화(圖畫)와 영어를 담당하는 교사로 임용련(486)이 부임하여, 그로부터 미술 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 미술과를 수석(首席)으로 졸업한 수재로, 학교 안에 미술실을 확보하고, 화가인 아내 백남순(211)과 더불어 주말마다 학생들과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고 품평회를 열었다. 또한 학생들에게 향토적인 주제에 의한 미의식(美意識)을 가르쳤으며, 이중섭의 그림을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보여 주며 장래의 거장(巨匠)이라고 종종 칭찬하였는데, 이는 이중섭의 화업(畫業)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중섭은 일제(日帝)의 국어 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한글 자모(字母)로 구성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 때부터 그는 그림에 한자나 한글 이외의 다른 문자로 서명(署名)하는 일이 없었다. 이 무렵 들판에 있는 소[牛]를 관찰하여 소를 즐겨 스케치하였으며, 두꺼운 한지(韓紙)에 먹물을 칠한 뒤 철필이나 펜촉으로 긁어 내 흰 바탕이 드러나게 하는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하였다. 그 뒤 이는 은박지(銀箔紙) 그림 등으로 나타나서 그의 예술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이 해에 문학수가 동맹 휴학 주동자로 학교에서 제적(除籍)되었다.

1932년(16세)에는 어머니와 형네 식구가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함경도 원산(元山)으로 옮겨 갔다. 방학 때에는 원산 근처 바닷가로 놀러 가서 해수욕과 낚시를 즐겼고, 서양 고전 음악 감상에 몰두하였다.

1934년(18세) 1월, 낡은 학교 건물을 일본인 보험사의 보상금으로 새로 짓자는 계획을 세우고 본관 화학실에 불을 지르기로 동무들과 모의(謀議)하였다. 그러나 실행하지는 못하다가 그 중 한 명이 몰래 불을 질렀으며, 이중섭이 이를 뒤집어쓰기로 하고 임용련에게 고백하여 묵인을 받았다.

1935년(19세) 오산 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 기념 사진첩 장식을 맡았는데, 서명란(署名欄)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玄海灘, 대한 해협 남쪽, 일본 규슈 북서부에 펼쳐져 있는 해역)에서 조선 땅으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소동이 일어났고, 졸업 기념 사진첩의 제작이 취소되었다.

졸업한 뒤 미술 공부를 위하여 프랑스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으로 가서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 지금의 무사시노 미술 대학교(武藏野美術大學校)]에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상급 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쾌대(471)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스케이트를 타다가 크게 다쳐서 요양에 들어갔다.

1936년(20세), 데이코쿠 미술 학교의 복학을 포기하고 3년제의 전문 과정인 분카 학원(文化學院)에 입학하여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하였다. 이 곳에는 평양 종로 공립 보통 학교 동무였던 김병기와 오산 학교에서 같은 미술반이었던 문학수가 먼저 입학해 있었으며, 이 밖에도 입학 동기로 안기풍⋅이정규⋅홍준명 등이 있었고, 이들 외에도 김환기(112)⋅유영국(372)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이중섭의 그림에 대하여 교수가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973, 에스파냐의 화가)의 모방이라고 비판하자 이에 항의하기도 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많은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우리말 노래를 유창하게 불렀고, 작업으로 어질러진 하숙방에서도 난초를 키우는 정갈함이 있어 급우들의 찬탄을 받았다. 민족 차별 태도가 없었던 화가 쯔다 세이슈(津田正周)를 알게 되어 급속히 가까워졌다.

1937년(21세) 도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일본의 전위적(前衛的)인 미술 단체 자유 미술 협회(自由美術協會)의 제1회 자유 미협전에 출품하여 특별상인 태양상(太陽賞, 원명은 조선 예술상)을 받았다.

1938년(22세) 5월, 제2회 자유 미협전에 소묘(素描) 3점과 두 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협회상을 받았다. 다키구치 슈조(瀧修造, 일본의 시인이며 평론가)와 하세가와 사부로(長谷川三郞, 1906~1957, 일본의 화가) 등이 글을 통하여 이중섭의 작품을 극찬하였다. 연말 또는 이듬해 초에 병으로 휴학하고 원산으로 돌아갔다.

1939년(23세)에 자유 미술 협회 회원이 되었다.

1940년(24세), 복학한 직후 분카 학원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와 사랑에 빠졌다. 이 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자유 미협전에 [망월(望月)]⋅[산의 풍경]⋅[서 있는 소]⋅[소의 머리]을 출품하였다. 김환기와 진환이 글을 통하여 극찬하였다. 이 무렵부터 자주 개성 박물관(開城博物館)에 들러 연구와 스케치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이듬해 창립전을 치르는 조선 미술가 협회(朝鮮美術家協會)의 준비를 위하여 이 무렵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이쾌대와 그의 형 이여성(438)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보인다.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분카 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생 과정으로 계속 학교에 다녔다.

1941년(25세) 3월, 김환기(112)⋅문학수⋅유영국(372)⋅이쾌대(471) 등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미술가들과 서울에서 조선 신미술가 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를 결성하여, 도쿄에서 열린 그 창립전에 [연못이 있는 풍경] 등을 출품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회원전을 가졌다.

이 해 4월, 제5회 자유 미협전에 [망월]과 [소와 여인]을 출품하였고 이마이 한자부로(今井繁三郞) 등에게 격찬을 받았다. 5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조선 신미술가 협회전에 출품하였다.

늦여름부터 초가을 동안에는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서 지냈다. 이 무렵 본격적으로 엽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이 해에만 90점 가까이 그려 마사코에게 보냈다. 이 엽서 그림 그리기는 1943년까지 계속된다. 9월부터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의 주소면에 자기 이름을 ‘소탑(素塔, 흰 탑)’이라고 썼다. 어린이 그림을 연구하였는데 이런 흔적은 엽서 그림의 원시주의(原始主義, primitivism)적 화풍(畫風)과 재료로 드러난다. 이 무렵 프랑스 유학을 원하였으나 형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1942년(26세) 4월, 제6회 자유 미협전에 [목동]⋅[봄]⋅[소묘]⋅[소와 아이](개인 소장)⋅[지일(遲日)]을 출품하였다. 5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조선 신미술가 협회전에 출품하였다. 이 무렵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에 와 있던 시인 지망생 양명문(楊明文, 1913~1985, 한국의 시인)과 니혼 대학교(日本大學校) 종교과 학생이던 구상(具常, 1919~2004, 한국의 시인)을 알게 되었다. 애인의 모습을 담은 연필화 [여인(女人)]을 그렸으며, 여기에 ‘대향(大鄕)’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1943년(27세) 3월, 제7회 자유 미협전에 ‘이대향’이라는 이름으로 5점의 소묘와 [망월]⋅[소와 소녀]⋅[여인] 등을 출품하였는데, [망월]로 태양상을 받았다. 5월에 서울에서 세 번째로 열린 조선 신미술가 협회전에 출품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 원산에 머물면서 작업에 몰두하였다.

원산에 돌아온 뒤 몇 년 동안 같은 방을 썼던 조카 이영진의 증언에 따르면, 이중섭은 여러 해에 걸쳐 두고두고 손질하면서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런 작업 태도는 월남(越南)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44년(28세)에는 제4회 소품전에 출품한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징병(徵兵)을 피하기 위하여 고아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해 말, 평양 체신 회관(遞信會館)에서 김병기⋅문학수⋅윤중식(388)⋅이호련⋅황염수(黃廉秀, 1918~, 한국의 서양화가) 등과 6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의 출품작 가운데는 소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1945년(29세) 4월, 마사코가 배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왔다. 이 해 5월, 결혼하고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李南德)으로 바꾸었다. 원산 광석동(廣石洞)에 신혼집을 마련하였으나 곧 소련의 폭격으로 교외(郊外)에 있는 과수원으로 이사하였고, 그 직후 광복을 맞이하였다.

같은 해 10월, 서울 덕수궁(德壽宮) 석조전(石造殿)에서 열린 해방 기념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하여 여러 해 동안 다듬어 오던 연필화 [세 사람]과 [소년]을 들고 갔으나 늦어서 출품하지 못하였다. 이 그림들은 곧 인천(仁川)에서 열린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이 무렵 최재덕(崔載德, 1916~?, 북한의 화가)과 함께 지금의 서울 미도파 백화점(美都波百貨店) 지하실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을 소재로 벽화를 그렸는데, 밑그림은 이중섭이 맡았다.

한편, 이 무렵 명동(明洞)의 술집에서 동무가 여러 사람들에게 뭇매질을 당하자 그것을 막느라 싸우다가 그 곳을 순찰 중이던 미군 헌병들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졌다.

미도파 백화점 벽화 제작의 사례로 받은 돈으로 많은 골동품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 때 구입한 작은 불상(佛像)은 늘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등잔은 원산에서 살던 내내 불 밝히는 데 사용하며 애지중지하였다. 평양에 갈 때마다 서예가이며 수집가로 이름 높은 김광업(金廣業, 1906~1976, 북한의 안과 의사이며 전각가) 등으로부터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946년(30세) 2월, 북조선 문학 예술 총동맹(北朝鮮文學藝術總同盟) 산하의 미술 동맹 원산 지부 회화부원이 되었다. 또한 조선 미술 협회(朝鮮美術協會)를 탈퇴하였던 사람들로 구성된 진보 미술 단체인 조선 조형 예술 동맹(朝鮮造形藝術同盟)에 가입하였다. 이 모임에서 단상(壇上)에 올라가 발언 중이던 길진섭(60)의 따귀를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5월에 열린 조선 신미술가 협회전에 출품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원산 사범 학교(元山師範學校) 미술 교사가 되었으나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으며, 이 무렵 화가 지망생 김인호와 인연을 맺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었으며, 이 때 아이의 관(棺)에 복숭아를 쥔 어린이를 그린 연필화 여러 점을 넣었다.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잠시 하였고, 연말에 구상이 원산 문학가 동맹(元山文學家同盟)에서 펴낸 동인(同人) 시집 [응향(凝香)](1946년) 표지 그림으로 춤추는 군동상(群童像)을 그렸다.

1947년(31세) 초, 북조선 문학 예술 총동맹으로부터 [응향]에 실린 구상의 시를 비롯하여 강홍운(康鴻運)⋅서창훈(徐昌勳) 등의 시와 함께 그의 표지화가 인민성(人民性)과 당성(黨性)이 결여되어 있고 회의적(懷疑的)⋅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반동(反動) 작가로 지적되면서 맹렬하게 비판받았고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다. 결국 구상은 1947년 가족을 남겨 둔 채 홀로 월남하였고, 이중섭은 이 탄압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았으며, 그 뒤 불우 어린이들의 무료 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같은 해 6월, 동무 오장환(吳章煥, 1916~1951, 한국의 시인)의 시집 [나 사는 곳]에 속표지 그림을 그렸다. 8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해방 기념 미술 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은 나는 어린이]를 출품하였다. 이 작품에 대하여 소련인 평론가 나탐이 극찬하였다.

이 해 겨울에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8년(32세) 2월, 미군정(美軍政)의 체포령을 피하여 월북(越北)한 오장환을 만났다. 이 해 평양을 거쳐 원산에 온 소련의 미술가와 평론가 세 사람이 그의 그림을 보고 천재이기 때문에 ‘인민의 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그의 그림은 성난 소와 닭, 까마귀들을 굵은 선과 속도감 있는 필치로 그린 것이었다. 그 뒤 이러한 압력을 피하여 소련식 사회주의적 사실주의(社會主義的 寫實主義, social realism)풍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1949년(33세) 봄에 둘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으며, 원산에서 북서쪽으로 3㎞쯤 떨어진 북한 제일의 해안 휴양지 송도원(松濤園)으로 이사하였다. 이 무렵 박수근(204)과 자주 교유하였고,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가 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려 고발당하기도 하였다.

1950년(34세)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가장(家長)인 형이 행방불명되었다. 10월, 미국군의 개입으로 전세(戰勢)가 바뀌면서,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피신하였다.

12월 초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바뀐 전세와 미국군의 원자탄 투하 위협에 따라 피난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와 나머지 가족들을 두고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이영진과 함께 그리다가 만 작품 한 점만을 가지고 후퇴하는 국군의 화물선을 타고 사흘 걸려 부산(釜山)에 도착하였다. 곧 피난민 수용소에 가게 되었고, 신상(身上) 조사를 마친 뒤 외부 출입이 허용되면서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을 하였다. 이 때 널빤지를 훔친 껌팔이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헌병들을 말리다가 헌병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큰 상처를 입었다.

1951년(35세) 봄, 악화된 전세에 따른 당국의 선전으로 가족과 제주도(濟州道)로 건너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西歸浦)에 도착하였는데, [피난민과 첫눈]은 이 때의 체험을 그린 것이다. 변두리의 작은 방을 제공받아 살았는데, 적은 양의 배급과 고구마, 바닷가에서 잡아 온 게로 연명하였다. 이 곳에서 오랜만에 평온한 눈빛을 지닌 소를 목격하고 다시 소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특히 이웃집에 있는 잘생긴 소에 반하여 이를 열심히 그렸다. 또한 뒷날에 벽화를 그리겠다며 갖가지 조개 껍데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9월에 부산에서 열린 전시 미술전[戰時美術展, 또는 월남 미술가전(越南美術家展)]에 출품하였다. 서귀포에서는 유화(油畫) [바닷가의 아이들]⋅[서귀포의 환상(幻想)]⋅[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을 그렸다. 배를 태워 준 선주(船主)에게 사례하기 위하여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고 하는데, 이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12월 무렵 다시 부산으로 옮겨 가 오산 학교 후배를 만나 범일동(凡一洞)에 있는 귀환 동포를 위한 판잣집을 얻게 되었다. 이 때 이 곳 풍경을 그린 것이 [범일동 풍경]이다. 이 무렵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왔다.

1952년(36세) 2월, 국방부 정훈국 종군 화가단(從軍畫家團)에 가입하였고, 3월 종군 화가단이 대한 미술 협회(大韓美術協會, 美協)와 공동으로 연 삼일절 경축 미술전에 출품하였다. 이 무렵 군부대의 부두 노동을 하며, 재료가 없어 양담배갑을 모아 은종이를 화폭 대신 썼다.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으며 아내가 폐결핵에 걸려 각혈(咯血)을 하고 아이들이 병드는 등 생활고(生活苦)가 계속되었으므로,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여름에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 뒤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박고석(194)의 집에서 3개월 가량을 지냈다. 이 때 연필 스케치를 매우 많이 하였으나 거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어서 한묵(韓墨, 1914~, 한국의 추상화가)이 의뢰받은 노래극의 공연에 필요한 무대 장치와 의상, 소도구 만들기 등을 도우며 남포동(南浦洞)에서 지냈다. 또 영도(影島)에 있는 대한 경질 도기 주식 회사(大韓硬質陶器株式會社)에 다니던 황염수의 소개로 그 회사 작업대 위에서 두 달 동안 미술 대학생 김서봉(金瑞鳳, 1930~2005, 한국의 화가)과 함께 지냈다.

10월부터는 주간(週刊)으로 발행되던 [문학 예술(文學藝術)]에 삽화를 그렸다.

12월에는 미국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 재단으로부터 그림 재료를 제공받아 작업한 것을 박고석⋅손응성(257)⋅이봉상(414)⋅한묵 등과 전람회를 통하여 발표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 있던 아내가 이중섭의 생활비와 그림 제작비를 위하여 일본 서적들을 보내 주어 팔았으나 책값을 떼이고 큰 손해를 보았다. 또 일본에 밀항하였다가 붙잡힌 이중섭의 동무가 보증금과 여비를 아내에게 빌리고는 이를 돌려 주지 않아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연말에 일본으로 가기 위하여 애썼으며, 이를 위하여 구상과 김광균(金光均, 1914~1993, 한국의 시인), 일본의 지인(知人)들이 힘을 썼다. 처가에서도 주위의 고관(高官) 등에게 부탁하는 등 이중섭이 일본으로 올 수 있도록 매우 노력하였다.

1953년(37세) 5월 말 신사실파(新寫實派)에 가입하였으며, 그 세 번째 동인전(同人展)에 두 점의 [굴뚝]을 출품하였다가 당국의 조사를 받고 철거당하였다.

7월 말, 오랫동안 애쓴 끝에 선원증(船員證)을 입수하여 일본으로 가서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이 때, 늘 지니고 다니던 불상과 태양상의 부상(副賞)으로 받은 팔레트, 70매 가량의 은박지 그림들을 아내에게 맡겼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가기 위하여 애썼으나생전에 다시 가지는 못하였다. 이 무렵부터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림을 함께 부쳤다.

8월 휴전이 성립되면서 정부가 서울로 돌아갔다. 이중섭의 고미술(古美術)에 대한 안목을 신뢰한 경상 남도 통영(統營) 나전 칠기 기술원 양성소(螺鈿漆器技術員養成所) 교육 책임자인 유강렬(366)의 권유로 통영으로 갔다. 이 곳 졸업생으로 화가를 지망하던 이성운과 한 방에서 지내며 제작에 몰두,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달과 까마귀]⋅[떠받으려는 소](홍익 대학교 박물관)⋅[부부(夫婦)]⋅[흰 소](1953년, 41×29cm, 홍익 대학교 박물관) 등 여러 작품을 완성하였다.

1954년(38세) 봄에 이성운과 통영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여,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복사꽃이 핀 마을]⋅[충렬사 풍경]⋅[푸른 언덕] 등을 그렸다.

5월 무렵 통영의 한 다방에서 유강렬⋅장윤성⋅전혁림(516)과 4인전을 열었으며, 그 뒤 나전 칠기 기술원 양성소에 분규가 생겨 곧 통영을 떠났다.

박생광(202)의 초대로 경상 남도 진주(晉州)로 갔다가 대구(大邱)를 거쳐 초여름 무렵 서울로 갔으며, 그 뒤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6월에는 한국 전쟁 발발 4주년을 기념하여 국방부와 대한 미술 협회가 공동 주최하여 경복궁(景福宮) 미술관에서 연 전람회에 [달과 까마귀]⋅[닭]⋅[소](뉴욕 현대 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등 세 점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7월에 원산 사람 정치열이 종로구 누상동(樓上洞)에 있는 집을 제공해 주었는데, 여기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으로 제작에 몰두하였다. 이 집에서 대표작 [길 떠나는 가족](개인 소장)⋅[도원] 등을 그렸다. 연말에 집이 팔리자 이종 사촌 이광석의 집으로 옮겨 전시회 마무리에 전념하였다.

1955년(39세)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미도파 화랑(美都波畫廊)에서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박지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여 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일반의 호평과는 달리 몇몇 평론가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혹평하였으며, 출품작 중의 은박지 그림이 외설(猥褻)스럽다고 하여 당국이 철거하는 등 소동이 일어났다.

전시 기간 내내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등 무리를 하였고, 전시가 끝난 뒤에는 그림값도 제대로 못 받는 등 아내의 빚을 갚아 보려는 애초의 목적을 전혀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곧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대구역 앞의 여관과 경상 북도 칠곡(漆谷)의 최태응(崔泰應, 1917~1998, 한국의 소설가) 집 등을 떠돌아다니며 제작을 계속하여, 5월에 대구 미국 문화원(美國文化院)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실망과 분노의 감정에 영양 부족까지 겹쳐 극도로 쇠약해졌다. 당시 미국 문화원 원장이던 맥타가트(Arthur Joseph McTaggart, 1915~2003, 미국의 관리이며 교수)가 이 전시회에 출품한 은박지 그림 세 점을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당시 동무 구상이 경상 북도 칠곡군 왜관읍(倭館邑) 왜관리의 관수재(觀水齋)(2002년 10월 4일, 칠곡군에서는 군 예산으로 이 곳에 ‘구상 문학관’을 세웠다.)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곳에서 요양하였다. 이 무렵 단란한 구상의 가족을 부러운 듯 쳐다보는 자신이 등장하는 [구상네 가족]과 [성당 부근] 등을 그렸다.

대구로 올 때부터 노이로제 환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여관의 손님 신발을 모두 거두어 씻기도 하고, 청소를 하기도 하는 등 보상(報償) 행위에 몰두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정신 병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 해 7월, 일본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 분열 증상을 나타나, 한 달 동안 대구의 성가 병원(聖架病院) 정신과에 입원하였다. 이 때에도 자기가 정신 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연필로 사실적(寫實的)인 [자화상(自畫像)]을 그렸다.

동무들의 배려로 여러 병원으로 옮겨 다니며 치료하였는데, 8월 말쯤에는 서울의 이광석 집에 머무르게 되었으나 이광석이 미국으로 연수(硏修)를 떠나게 되어 동무들이 수도 육군 병원(首都陸軍病院) 정신과에 입원시켰다. 그 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겼고, 늦가을에 퇴원하여 한묵과 정릉(貞陵)에서 살았다. 이 무렵 극심한 황달(黃疸) 증세를 나타냈다.

1956년(40세) 영양 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봄에 청량리 뇌병원(淸涼里腦病院, 지금의 청량리 정신 병원) 무료 입원실에 입원하였다가 원장 최신해(崔臣海, 1919∼1991, 한국의 정신과 의사이며 수필가)에 의하여 정신 이상이 아니라 극심한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무단(無斷)으로 즉시 퇴원하였다.

얼마 동안 호전되었으나 퇴원한 뒤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극심히 나빠져 서대문 적십자 병원 내과에 입원하였다가, 한 달 가량 지난 뒤인 9월 6일 숨을 거두었다.

사흘 뒤 이 사실을 안 동무들이 장례를 치르고, 화장(火葬)된 뼈의 일부는 서울 망우리(望憂里) 공동 묘지에 안장(安葬)하고, 다른 일부는 일본에 살던 아내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모셔졌다.

1957년 이중섭을 따르던 조각가 차근호(車根鎬)가 새긴 묘비가 망우리 무덤에 세워졌다.

1965년에는 동무 김병기가 약전(略傳)을 썼으며, 1971년에는 당시 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 대학원생이던 조정자가 광범위한 조사를 거쳐 석사 학위 논문을 발표하였다.

1972년에는 서울 현대 화랑(現代畫廊)에서 15주기(週忌)를 기념하는 유작전(遺作展)과 작품집을 펴냈고, 1973년에는 고은(高銀, 1933~, 한국의 시인)이 조카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評傳)을 월간지의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펴냈다. 그 뒤 이를 바탕으로 영화와 연극, 텔레비전 드라마 등이 만들어졌다.

1978년에는 정부 수립 3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 훈장이 수여되었고, 1979년 4월, 아내가 간직해 오던 엽서 그림과 은박지 그림 등 모두 200점 가까운 작품이 서울 미도파 백화점 화랑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1980년에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동봉한 그림을 엮은 서간집(書簡集)이 출판되었고, 1986년에는 30주기를 맞아 경기도 용인(龍仁) 호암 미술관(湖巖美術館)에서 회고전(回顧展)이 열렸다.

1997년에는 피난 시절이던 1951년 당시 서귀포에서 살았던 집이 당시 서귀포 시장 오광협(吳光協, 1933∼)의 노력으로 발견되었고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또한 집 앞 서귀동 512번지 일대 360m 거리를 ‘이중섭 거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1999년에는 문화 관광부(文化觀光部)가 ‘1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한 것을 기념하여 서울 현대 화랑에서 이중섭전을 열었다. 연필화 [자화상]이 처음으로 전시를 통하여 소개되었다.

2005년 10월에는 박수근의 작품(1,746점)과 함께 그의 그림 994점이 미술계사상 최대의 위작(僞作) 시비(是非)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중섭은 자유로운 기질의 소유자로 예민한 감수성과 순진 무구함, 외곬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일본 유학시 보수적인 관학풍(官學風)의 경향보다는 오히려 서구 아방가르드(avant-garde) 회화에 깊이 빠지게 하였다.

감정이 실린 격렬한 필치와 강렬한 색감, 날카로운 선묘로 이루어진 독특한 조형 세계는 그가 야수파(野獸派, fauvisme<Wild Beasts>) 화풍에 얼마나 심취하였는지를 알려 준다. 그러나 문제 의식과 재능은 단순히 서양어법을 모방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그를 키워 준 향토의 숨결과 희망을 담게 하였다.

초기 작품에서는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나, 그 뒤로는 피난 시절 가족과의 생활,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 등 생활 일기와 같은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의 예술 세계는 철저하게 자신이 처한 삶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려운 시대에 개인적 삶의 고뇌를 지극히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한 시대의 아픔을 극명하게 나타냈다. 동시에 서양 미술의 어법을 완벽하게 소화⋅흡수하여 개성적인 조형을 성취함으로써 한국 미술의 한 전형(典型)을 이루었다. 특히 원산에서 그린 소묘를 비롯하여, 담배갑 은박지에 예리한 송곳으로 긁어서 가족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을 표현한 후기의 은지화(銀紙畫)는 자유자재한 선묘(線描)와 심도 있는 정서적 표현력을 보인 탁월한 작품이다.

작풍(作風)은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 우리 나라 서구 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 밖의 작품으로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1950년대, 32.8×20.3cm)⋅[닭과 가족]⋅[사내와 아이들](개인 소장)⋅[아이들과 물고기와 게]⋅[움직이는 흰 소](개인 소장)⋅[투계(鬪鷄)](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해변의 가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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