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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쾌대(李快大) -

- 생몰년 : 1912?~?
- 국    가 : 한국


李快大 1912?~?

북한의 화가.

만석꾼인 아버지 이경옥(李敬玉)과 어머니 윤정렬(尹貞烈)의 2남 4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경상 북도 칠곡(漆谷)에서 태어났다. 형은 월북(越北) 작가이며 역사화가인 이여성(438)이다.

대구(大邱) 수창 공립 보통 학교(壽昌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휘문 고등 보통 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지금의 휘문 중⋅고등 학교)에 들어가 장발(495)의 지도를 받았다. 재학 중인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정물(靜物)]로 입선하였고, 그 해 가을에는 제3회 전(全)조선 남녀 학생 작품 전람회 회화부 2등상을 받았다.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 지금의 무사시노 미술 대학교(武藏野美術大學校)]에 진학하여 재학생 중심의 하라츠바(ハラツバ) 양화(洋畫) 전람회, 일본 유학생들이 망라된 재(在)도쿄 미술 학생 종합전에 출품하였고, 일제(日帝)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운명(運命)](1938년)을 일본의 공모전인 녹포사전(綠袍社展)⋅이과전(二科展) 등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40년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 학교 출신인 박득순(200)⋅손응성(257)⋅조병덕(趙炳悳, 1916~, 한국의 서양화가) 등과 그룹전 ‘재동경 미술 협회전(在東京美術協會展)’ 등에 참가하였다.

1941년에는 도쿄에서 조선 미술가 협회(朝鮮美術家協會)를 조직하여 중심적으로 이끌었으며, 김환기(112)⋅문학수(184)⋅유영국(372)⋅이중섭(467) 등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미술가들과 조선 신미술가 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를 조직하여 모더니즘 미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여러 차례 회원전을 가졌다. 특히 제3회 협회전에 출품한 [부인도(婦人圖)]⋅[탁자 위의 정물] 등은 참신한 표현 기법과 조형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광복된 뒤에는 1946년 조선 미술 협회(朝鮮美術協會)를 탈퇴하였던 사람들로 구성된 진보 미술 단체인 조선 조형 예술 동맹(朝鮮造形藝術同盟) 회화부 위원을 거쳐, 조선 미술 동맹(朝鮮美術同盟) 서양화부 위원장으로 진보적 미술인들의 조직을 이끌었다.

미군정(美軍政)의 강화에 따라 1947년 김인승(96)⋅남관(215)⋅이규상(397)⋅이인성(453) 등과 정치색이 배제된 조선 미술 문화 협회(朝鮮美術文化協會)를 조직, 그 위원장에 선임되어 1949년까지 네 차례의 연례 회원전에 참가하였다. 그 중 제3회전에 출품한 [조난(遭難)](1948년)은 정체 불명의 군용기(軍用機)에 무고한 어민이 무차별 살상당한 독도(獨島)에서의 사건을 그린 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다.

1949년 11월 창설된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에는 추천 작가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12월에 설립된 보도 연맹(保導聯盟, 1949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 단체로, 정식 명칭은 ‘국민 보도 연맹’)에도 가입하였다.

1950년에는 손응성⋅이봉상(414)⋅이완석(李完錫)⋅이해성 등과 함께 서울 남산(南山)에 시립 미술 연구소(市立美術硏究所)를 설립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조선 미술 동맹을 조직하여 북한군 종군(從軍) 화가로 활동하였으며, 9⋅28 수복 직전에 서울을 탈출하였으나 체포되어 경상 남도 거제도(巨濟島)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휴전 직전 남북 포로 교환 때 북한을 선택하였다.

1987년 정부에서 월북 예술인 해금(解禁) 조처를 내린 뒤, 1990년 ‘해금 작가 유화전’에서는 광복 이전에 제작한 [부인도](1943년) 등 3점이 선보였으며, 1991년 ‘월북 작가 이쾌대전’에 40여 점의 작품이 선보여 그의 예술 세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초기 습작 시절부터 인물상에 주력하여 [나부(裸婦)]⋅[누워 있는 나부]⋅[여인상(女人像)]⋅[자화상(自畫像)] 등에서 보여 준 충실한 소묘(素描)를 바탕으로 [2인 초상]⋅[첼리스트]에서는 표현적인 기법으로 인물의 개성을 강하게 포착하였다.

또 [운명]⋅[작품](1938년)에서는 상징적인 인물 설정과 구도를 보였으며 이 작품과 함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부녀도(婦女圖)](1941년)⋅[부인도] 등에서는 얇은 붓질과 맑은 담채(淡彩) 효과로 동양화와 같은 분위기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인물상 수련을 바탕으로 [조난]을 비롯하여 여러 군상(群像) 작품을 제작하였다.

1940년대 말로 추정되는 군상 작품에서는 구도나 인물 표현에서 단단한 해부학 수련을 바탕으로 서양의 역사화나 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적인 기법을 빌려 온 것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경상 남도 거제도(巨濟島)의 미군기 폭탄 투하 사건을 비롯한 해방 공간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또 한편으로는 그런 가운데 새로이 나라를 건설해 가는 사람들의 힘과 희망을 힘찬 필치와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하였다. [걸인(乞人)](1948년, 91×60cm)에서는 대담한 소재와 표현적인 기법으로 현실 사회의 단면을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작품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던 해방 공간 미술의 한 면을 메웠으며, 우리 나라 현실주의(現實主義, realism) 미술의 선구적(先驅的)인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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