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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석진(趙錫晉) -

- 생몰년 : 1853~1920
- 국    가 : 한국


趙錫晉 1853~1920. 5. 31.

조선(朝鮮, 1392~1910)의 동양화가.

호(號)는 소림(小琳), 본관(本貫)은 함안(咸安).

할아버지는 종6품 아문(衙門)인 도화서(圖畫署) 화원(畫員)인 조정규(547)이며, 아버지 조용찬과 어머니 문의 박씨(文義朴氏) 사이에서 황해도 옹진(甕津)에서 태어났으며, 나중에 조성완의 양자(養子)가 되었고, 서울에서 죽었다.

할아버지에게 화기(畫技)를 배워 산수(山水)⋅인물⋅기명(器皿)⋅화조(花鳥)⋅절지(折枝)⋅어해(魚蟹)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하였다.

1881년 28세 때 안중식(300)과 함께 영선사(領選司)의 제도사(製圖士)로 뽑혔고, 신무기 제조법을 배우기 위하여 관비생(官費生)으로 1년 동안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톈진(天津)에 가서 1년 동안 머물며 새로운 문물을 접하였다.

도화서 화원으로, 고종(高宗, 1852~1919, 조선의 제26대 왕. 재위 1863~1907)의 어진(御眞)을 그린 공으로 영춘(永春) 군수(郡守)가 되고 정3품에 올랐다.

1902년 고종 등극 40주년 기념으로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뒷날의 순종(純宗), 1874~1926, 조선의 제27대 왕이며 최후의 왕. 재위 1907~1910]의 어진을 안중식과 함께 제작하여 평양(平壤)과 기로소(耆老所) 영수각(靈壽閣)에 봉안(奉安)하였다.

1911년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 미술원(畫美術院)을 조직하고 서화 미술전을 열어 산수화와 인물화를 출품하였다.

1918년 6월 16일, 우리 나라 최초로 민족 서화가들의 단체로 순수 근대 미술 동인회(同人會)인 서화 협회(書畫協會)가 창립될 때 13명의 발기인(發起人)[강진희(23)⋅강필주(姜弼周, 1860?~1923, 한국의 화가)⋅고희동(37)⋅김규진⋅김돈희(金敦熙, 1871~1937, 한국의 서예가. 서화 협회 제4대 회장)⋅김응원(93)⋅안중식⋅오세창(吳世昌, 1864~1953, 독립 운동가이며 언론인⋅서예가)⋅이도영(403)⋅정대유(520)⋅정학수(533)⋅조석진⋅현채(玄采, 1856~1925, 한국의 사학자이며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안중식에 이어 제2대 회장을 맡았다.

각 분야에 재능을 보이며 안중식과 더불어 쌍벽(雙璧)을 이루며 구한국 최후까지의 대표적인 동양화가였다.

만년(晩年)에는 후진 육성에 힘써 변관식(216)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 그 뒤 한국 화단(畫壇)의 중심적인 작가로 성장하게 하였다.

작품으로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이화 여자 대학교 박물관)⋅[군리도(群鯉圖)]⋅[노안도(蘆雁圖)](1910년, 62.5×124.5cm,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매림유거도(梅林幽居圖)]⋅[매조도(梅鳥圖)]⋅[잉어도](36×24cm, 개인 소장)⋅[추림취월(秋林醉月)]⋅[화조(花鳥)](1912년,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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