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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석(趙榮祏) -

- 생몰년 : 1686~1761
- 국    가 : 한국


趙榮祏 1686(숙종 12)~1761(영조 37)

조선(朝鮮, 1392~1910)의 문인화가(文人畫家).

자(字)는 종보(宗甫), 호(號)는 관아재(觀我齋)⋅석계산인(石溪山人), 본관(本貫)은 함안(咸安).

아버지는 군수(郡守)를 지낸 조해(趙楷, 1639~1699, 조선의 문신)이며, 이희조(李喜朝, 1655~1724, 조선의 문인이며 유학자)의 문인(門人)이다.

1713년(숙종 39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고, 1718년 천거로 등용(登用)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1756년(영조 32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이듬해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1732년 맏형 조영복(1672~1728)의 초상화 [조영복 영정](80×154cm, 경기도 박물관)을 그렸다. 이 초상화는 1726년 조영석이 초고(草稿)를 그리고 이듬해 윤색(潤色)을 가하였고, 이 해에 진재해(567)로 하여금 별도로 공복 본상(公服本像)을 그리게 한 뒤, 1732년 다시 조영석이 완성하였다.

1735년 세조(世祖, 1417~1468, 조선의 제7대 왕. 재위 1456~1468) 어진(御眞) 모사(模寫)에 불응하여 투옥되었으며, 1748년 숙종(肅宗, 1661~1720, 조선의 제19대 왕. 재위 1675~1720) 어진 모사에도 감동(監董)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예(技藝)로 왕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며 사양하였다.

서울 인왕산(仁旺山) 아래의 순화방(順化坊)에서 정선(522)과 이웃하여 살면서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조선의 시인)⋅이병성(李秉成, 1675~1735, 조선의 문신. 이병연의 아우)⋅유척기(兪拓基, 1691~1767, 조선의 문신)⋅조정만(趙正萬, 1656~1739, 조선의 문신) 등과 어울려 시화(詩畫)를 논하며 각별하게 지냈다.

홍의영(洪儀泳, 1750~1815, 조선의 문신)의 [관아재화첩(觀我齋畫帖)] 발문(跋文)에 따르면 ‘본래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겸하여 산수(山水)도 잘 하였는데 금강산(金剛山)을 다녀온 뒤로 화경(畫境)이 더욱 진보되어 명작을 많이 낸 바 있고, 또한 고화(古畫)에 대한 논평을 좋아하였으나 간혹 지나친 점이 있어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서민 풍속화는 윤두서(380)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충실히 계승하여 김홍도(110)나 신윤복(277)의 시대로 이어지는 데 교량 역할을 하였던 화가가 바로 조영석이다.

그림에 대해서 우의성(寓意性)과 공리적(功利的) 가치를 강조하였으며, 인물과 산수 등에서 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조선 후기 남종화(南宗畫)의 정착과 풍속화의 전개에도 선구적(先驅的)인 역할을 하였다.

40세 이전까지는 화보풍(畫譜風)을 주로 다루다가 40~50대를 통하여 사생(寫生)과 풍속에 관심을 보였으며, 60대 이후에는 수묵(水墨) 위주의 표현적 세계와 시적(詩的)인 정취에 몰두하였다.

산수와 인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였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어 그림과 함께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삼원삼재[三園三齋, 단원(檀園) 김홍도⋅혜원(蕙園) 신윤복⋅오원(吾園) 장승업(497), 현재(玄齋) 심사정(281)⋅겸재(謙齋) 정선⋅관아재 조영석, 조영석 대신에 공재(恭齋) 윤두서를 넣기도 한다.]’의 한 사람이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작품으로 [강성조어도(江上釣魚圖)](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방당인필어선도(倣唐人筆漁船圖)](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봉창취우도(蓬窓驟雨圖)](서울 덕수궁 미술관)⋅[사제첩(麝臍帖)](29.6×39cm, 모두 14점, 개인 소장)⋅[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개인 소장)⋅[승려탁족도(僧侶濯足圖)](29.8×14.7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원주행선도(原州行船圖)](43.5×62.5cm, 개인 소장)⋅[이 잡는 노승(老僧)]⋅[장기도(將棊圖)](서울 간송 미술관)⋅[절구질](24.4×23.5cm, 서울 간송 미술관)⋅[죽하기거도(竹下箕踞圖)](서울 덕수궁 미술관) 등이 있고, 문집 [관아재고(觀我齋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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