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년
: 1891~1977
- 국 가
: 한국
許百鍊 1891(고종 28)~1977
한국의 동양화가.
호(號)는 의재(毅齋), 본관(本貫)은 양천(陽川).
전라 남도 진도(珍島)에서 태어났다.
8세 때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종고조(從高祖)뻘 되는 허유
(608)의 아들 허형[許瀅, 1861~1938, 미산(米山), 운림산방(雲林山房) 2대]에게 묵화(墨畫)의 기본 화법(畫法)을 익혔다.
1908년 공립 진도 보통 학교(公立珍島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장의 구타에 항의⋅자퇴(自退)하고, 서울로 가서 18세에 스승 정만근의 권유로 기호 학교(嗜好學校)에 다녔다.
1910년 일본 국립 입명관 대학교(立命館大學校) 법학과에 다녔으나 곧 중퇴하고 일본 남종화(南宗畫)의 고무로 스이웅(小室翠雲, 1874∼1945) 문하(門下)에 있었다.
귀국한 뒤 그림 공부에 전념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20년 목포 공회당(木浦公會堂)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22년 제1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서 [추경산수(秋景山水)]가 1등 없는 2등으로 입상하였고, 제6회(1927년)까지 선전(鮮展)에 출품하였다.
1935~1937년(제14~16회) 선전에 연속 수석(首席)으로 입선함으로써 화단(畫壇)에 자리를 굳혔다. 그 뒤 전국을 유람하며 자연 체험을 하고 1938년 광주(光州)에서 서화가(書畫家)들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하였다.
광복된 뒤 조선 미술 건설 본부(朝鮮美術建設本部) 중앙 위원이 되었으며, 1953년 제2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부터 추천 작가⋅초대 작가가 되었고, 제13회까지 심사 위원을 지냈다.
1953년 광주 농업 고등 기술 학교(光州農業高等技術學校) 교장을 지냈고, 1958년에는 예술원(藝術院) 종신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62년 문화 훈장 문화 포장, 1966년 예술원상(미술 부문)을 받았다.
1971년에는 김은호
(92)⋅노수현
(126)⋅박승무
(205)⋅변관식
(216)⋅이상범
(421)과 함께 서울 신문사 주최 ‘동양화 6대가전’에 참여하였는데, 이 전시회는 일제(日帝) 강점기에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던 전통 화가 10명 가운데 당시까지 생존하여 화단의 원로로 위치를 굳히고 있던 6명의 화가를 초대하여 다시 부각시킨 전시였으며, 뒷날 ‘동양화 6대가’라는 용어의 진원지이기도 한 전시회였다.
1973년에 회고전(回顧展)을 가졌다.
한국 화단에서 남화(南畫)의 맥을 이은 대가(大家)의 한 사람으로, 단아하고 깊이 있는 운필(運筆)을 통하여 남화의 정신 세계를 가장 진솔하게 담아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으로 [두백농인(頭白農人)](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산수(山水)](1950년대, 104×137cm, 개인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