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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소치(許小癡) -

조선(朝鮮, 1392~1910)의 서화가(書?家).

자(字)는 마힐(摩詰), 호(號)는 소치(小癡)·노치(老癡)·석치(石癡), 본관(本貫)은 양천(陽川). 나중에 ‘련(鍊)’으로 개명(改名)하였다.

전라 남도 진도(珍島)에서 태어났다.

허균(許筠, 1569~1618, 조선의 문신이며 문학가)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 1586~1662,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맏아들이며 제15대 왕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의 처조카)의 후손으로, 어려서 해남(海南)의 윤선도(尹善道, 1587 ~1671, 조선의 문신이며 시인) 고택(古宅)에서 윤두서(380)의 작품을 방작(倣作)하면서 전통 화풍(?風)을 익혔다.

1839년(헌종 5) 해남 대흥사(大興寺) 초의 선사((艸衣禪師, 1786~1866, 우리나라의 차문화를 부흥시킨 승려)의 소개로 김정희(99) 문하(門下)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았다. 김수철(75)·박인석(朴寅碩, ?~?, 조선의 화가)·유숙(371)·유재소(376)·이한철(476)·전기(510)·조중묵(549) 등과 같은 김정희파 화가들과 교유(交遊)가 있었으며, 김정희의 화평(?評)을 통하여 그림 지도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서권기(書卷氣)와 문기(文氣)의 높은 화격(?格)을 터득하였으며, 김정희로부터 ‘소치 그림이 나보다 낫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가 지향하였던 회화 세계사가 사의(寫意, 외형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그린다는 뜻으로, 수묵화나 문인화가들이 이러한 경지를 추구하였다.)의 표출에 중점을 둔 남종 문인화(南宗文人?)였음은 이른바 ‘원말 4대가(元末四大家)’ 중의 한 사람인 황공망(620)의 호 대치(大癡)를 따라 자신의 호를 ‘소치’라고 한 것과, 중국 남종 문인화의 시조(始祖) 왕유(351)의 자를 그대로 ‘마힐’이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시(詩)·서(書)·화(?)를 모두 잘 하여 ‘삼절(三絶)’이라고 불리었고, 그 중에서도 묵죽(墨竹)을 잘 그렸으며,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題)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산수(山水)·모란·사군자(四君子)·괴석(怪石)·연꽃·노송(老松)·파초 등 여러 방면의 소재를 능숙하고도 대담한 농묵(濃墨)을 구사(驅使)하여 표현하였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다. 산수화는 김정희로부터 배운 중국 북송(北宋, 960~1126)의 미불(187), ‘원말 4대가’의 예찬(315)과 황공망, 청(淸)나라(1616~1912)의 석도(240) 등의 화풍과 남종 문인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이룩하였다.

특히 시·서·화가 조화된 화면 구성이라든지 피마준(披麻?, 마의 올을 풀어 빗어 놓은 것같이, 같은 방향의 선을 되풀이하여 길게 긋는, 남종화를 대표하는 동양 회화의 표현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중간중간에 가한 거칠면서도 짧은 터치는 그의 개성을 보여 준다. 김정희는 이러한 그의 그림에 대하여 ‘화법이 심히 아름다우며, 우리 고유의 습성을 타파하여 압록강(鴨綠江) 이동(以東)에는 그를 따를 자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김흥근(金興根, 1796~1870, 조선의 문신)·민승호(閔升鎬, 1830~1874, 조선의 척신)·민영익(閔泳翊, 1860~1914, 조선의 문신)·신헌(申櫶, 1810~1888, 조선의 무신이며 외교가)·정원용(鄭元容, 1783~1873, 조선의 문신)·정학연(丁學淵, 1783~1859, 정약용의 큰아들)·흥선 대원군[興宣大阮君, 1820 ~1898, 조선의 왕족이며 정치가.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高宗)의 아버지. 이름은 이하응(李昰應)] 등과 같은 명사(名士)들과 폭넓은 교유(交遊)를 가졌다.

1846년(헌종 12) 권돈인(102)의 집에서 살면서 헌종(憲宗, 1827~1849,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 1834~1849)에게 그림을 바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궁궐과 인연을 맺었다.

1848년(헌종 14) 헌종의 배려로 전라도 고부(古阜) 감시(監試)를 거쳐 친임회시(親任會試)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정희가 죽은 1856년(철종 7),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그림에 몰두하였으며, 1867년(고종 4)에는 <소치실록(小癡實錄)>을 펴냈다. 조선 말기 화단(?壇)에 남종화풍을 토착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의 화풍은 넷째 아들 허형[許瀅, 1861~1938, 미산(米山), 운림산방(雲林山房) 2대]과 손자 허건(605, 운림산방 3대)과 허림(許林, 1917~1942), 허건의 맏아들 허경(許?, 1933~, 남농 미술 문화 재단 이사장), 허림의 외아들 허문(許文, 1941~, 운림산방 4대), 허경의 아들 허진(許塡, 1962~, 전남 대학교 미술 대학 교수, 운림산방 5대), 방계(傍系)인 허백련(607) 등으로 가전(家傳)되어 호남(湖南) 지방의 서화 전통을 이루었다.

작품으로 <산수도(山水圖)>(1866, 61×20cm, 서울 대학교 박물관)·<괴석도 쌍폭(怪石圖雙幅)>·<김정희 초상>·<노송도 병풍(老松圖屛風)>·<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48.5× 99.2cm, 개인 소장)·<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만산묘옥도(晩山?屋圖)>·<묵해도(墨海圖)>·<방석도 산수도(倣石濤山水圖)>·<방예찬 죽수계정도(倣倪瓚竹樹溪亭圖)>·<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산수도첩(山水圖帖)>(43×27cm,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산수병풍(山水屛風)>·<죽수계정도(竹樹溪亭圖)>(25.4×19.3cm)·<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포도도(葡萄圖)>·<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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