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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羅蕙錫) -

- 생몰년 : 1896~1948
- 국    가 : 한국


羅蕙錫 1896. 4. 18.~1948. 12. 10.

한국의 여류 화가.

호(號)는 정월(晶月), 본관(本貫)은 나주(羅州).

신문학(新文學)을 존중하는 개화된 가정에서 군수(郡守)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의 5남매 중 둘째로,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태어났다.

서울 진명 고등 여학교(進明高等女學校, 지금의 진명 여자 중⋅고등 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에 유학 중이던 오빠 나경석(羅景錫, 1890~1959,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의 권유로 1913년 일본으로 가서 우리 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도쿄 여자 미술 학교(東京女子美術學校) 유화과(油畫科)에 입학, 최초의 여류 서양 화가가 되었다.

유학 시절에는 이광수(李光洙, 1892~?, 한국의 소설가)⋅최승구(崔承九, 1892~1917, 한국의 시인)와 교유(交遊)하면서 1914년 도쿄 유학생 동인지(同人誌) [학지광(學之光)]에 여권 신장(女權伸張)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理想的婦人)]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1918년 도쿄 여자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도 함흥(咸興) 영생 중학교(永生中學校), 서울 정신 여자 고등 학교(貞信女子高等學校) 미술 교사를 지냈는데, 이 해에 [경희]⋅[정순]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5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1920년 변호사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였으며, 그 해 7월 25일 창간된 [폐허(廢墟)] 창간 동인(同人)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남편의 도움으로 서울 경성 일보사(京城日報社) 내청각(來靑閣)에서 여류 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이는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로,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사에 따르면 ‘낙역부절(絡繹不絶)하여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고 한다. 그 해 4월에 열린 제1회 서화 협회 전람회(協展)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출품하였다.

1923년 일본 외무성(外務省)의 관리(官吏), 즉 만주(滿洲)의 부영사(副領事)가 된 남편을 따라 봉천[奉天,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의 성도(省都) 선양(瀋陽)]에서 살았다. 이 해 9월에 발족한 신미술 운동 단체 고려 미술회(高麗美術會)의 창립 동인으로 참여하는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26년부터 3년 동안 남편과 함께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영국⋅이탈리아⋅에스파냐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였고, 파리에서는 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랑송 아카데미(Academie Ranson)에서 미술 수업을 받으며 야수파(野獸派, fauvisme<Wild Beasts>)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귀국 도중 파리에서 그린 정원화(庭園畫)가 도쿄의 이과전(二科展)에 입선되었다. 또한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제1~11회(1922~1932년)까지 9차례나 출품하여 제2회(1923년) 때 [봉황성(鳳凰城)의 남문(南門)]으로 4등상, 제3회(1924년)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1925년) 때 [낭랑묘(娘娘廟)]로 3등상, 제5회(1926년) 때 [천후궁(天後宮)]으로 특선, 제10회(1931년) 때 [정원]으로 특선을 받았으며, 1931년에는 일본의 최대 공모전인 제국 미술전(帝國美術展, 帝展)에서도 입선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수원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여권 신장과 자유 연애론 등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유럽 여행 중 사귄 최린(崔麟, 1878~?, 3⋅1 운동 때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 나중에 철저한 친일파가 되었다.)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1931년 이혼하였다.

1932년 세계 일주 기행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삼천리(三千里)]에 연재하였다. 그 뒤에도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 결혼, 실험 결혼]⋅[이혼 고백서](1934년 [삼천리])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하였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3년 2월에는 서울 종로구 수송동(壽松洞)에 미술 연구소인 ‘여자 미술 학사’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하였다.

1937년부터 집을 떠나 충청 남도 예산(禮山) 수덕사(修德寺)⋅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등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유랑 생활에 들어가 그 뒤의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시립 자혜 병원(慈惠病院)에서 행려 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크게 1918년 도쿄 여자 미술 학교 졸업 때부터 1927년 무렵 만주 시기까지, 유럽 체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미술 활동을 거의 중단한 이후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24년 판넬에 제작한 [만주 봉천 풍경]은 안정된 구도에 색채의 표현이 부드럽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 서양화 도입 초기의 사실주의적이고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적인 화풍(畫風)을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유럽 여행을 통해서는 활달한 필치와 과감한 표현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자화상(自畫像)](1928년)에서는 강한 색채의 대비적 효과를 살린 표현 기법으로, [불란서 마을 풍경]⋅[에스파냐 해수욕장](1928년쯤)에서는 거침없는 필치에 자유 분방한 기법으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31년 이혼 이후 생활과 정신의 불안정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생동감과 활발함이 사라졌으며 작품 창작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 밖에 작품으로 [이른 아침(早朝)]⋅[무희(舞姬)](1927~1928년,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나부(裸婦)](1928년, 71×115.3cm,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별장(別莊)] 등이 있으며, 죽은 뒤에 그의 글을 모아 [날아간 청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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