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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관(南寬) -

- 생몰년 : 1911~1990
- 국    가 : 한국


南寬 1911. 11. 25.~1990. 3. 30.

한국의 서양화가.

본관(本貫)은 영양(英陽).

경상 북도 청송(靑松)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서 죽었다.

14세가 되던 1925년 일본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1937년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 학교(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하고, 구마오카 미술 연구소(態岡美術硏究所)에서 공부하였으며, 일본 문부성(文部省) 주최의 미술 전람회(文展) 등에 출품, 후나오카 미즈이상(賞)을 받았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하였고, 1947년 미군정(美軍政)의 강화에 따라 김인승(96)⋅이규상(397)⋅이인성(453)⋅이쾌대(471) 등과 정치색이 배제된 조선 미술 문화 협회(朝鮮美術文化協會)를 결성하고 1949년까지 네 차례의 연례 회원전을 가지며 두드러진 역량을 보였다. 국내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1949년 제1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에서 서양화부 추천 작가가 되었다.

1952년 일본으로 다시 가서 도쿄에서 제1회 일본 국제 미술전(도쿄 비엔날레)과 파리의 살롱 드 메(Salon de Mai, 해마다 5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전위 미술 전시회. 5월 살롱 또는 5월전) 도쿄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1955년 프랑스로 가서 파리 몽파르나스(Montparnasse) 가까이에 있는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 입학, 추상 회화(抽象繪畫)에 몰입하였고, 프티 팔레 미술관[Musée du Petit Palais, Paris, 정식 이름은 파리시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la Ville de Paris)]에서 열린 재불(在佛) 외국인 화가전과 현대 국제 조형 예술제 등에 출품하였다.

1958년 한국인 화가로는 처음으로 살롱 드 메에 초대되어 국제 무대에 진출하였고, 이어 마네시에(Alfred Manessier, 1911~1993, 프랑스의 화가)⋅아르퉁(Hans Hartung, 1904~1989, 독일 태생 프랑스의 추상화가) 등 현대 미술의 대가(大家)들과 함께 플뢰브(Fleuve) 화랑 초대전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화가로 인정받았다.

1966년 7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Provence-Alpes-Côte d’Azur) 지방 알프마리팀(Alpes-Maritimes)주 망통(Menton)에서 열린 생트비엔날레(Sainte Biennale)에서는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古蹟)](1965년)을 출품하여 뷔페(Bernard Buffet, 1928~1999, 프랑스의 화가)⋅아르망(Arman, 1928~2005, 프랑스의 화가이며 조각가)⋅타피에스(Antoni Tàpies, 1923~, 에스파냐의 화가)⋅피뇽(Edouard Pignon, 1905~1993, 프랑스의 화가)⋅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973, 에스파냐의 화가) 등의 쟁쟁한 거장(巨匠)을 물리치고 대상(大賞)을 받아 유럽에서의 확고한 작가적 위치를 다지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같은 해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고, 1968년 귀국한 뒤 국전(國展) 서양화 심사 위원장⋅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 교수(1968~1975년), 대한 민국 미술 대전(美展) 심사 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파리를 중심으로 한 작품 활동도 계속하였다.

1974년 한국 문화 예술상, 1981년 은관(銀冠) 문화 훈장 등을 받았다.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독일과 스위스 등 세계 여러 곳에서 20여 차례의 국외전과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90년 3월에는 제1회 도쿄 아트 엑스포(TOKYO ART EXPO)에 출품하였다.

일찍이 미술 평론가 가스통 디일로부터 ‘동서(東西) 양 문화의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1940년부터 프랑스 체류 이전까지의 화풍(畫風)은 후기 인상주의(後期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적 구성으로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us)적 인물을 구사(驅使)하였으며, 시각적인 감각을 살린 작품을 주로 보였다.

프랑스 체류 초기와 1960년대에는 앵포르멜(Informel, 非定形)의 기술적 방법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그의 추상 작품의 바탕으로 1970년대 들어서는 확고한 추상적 경향의 안정된 색조를 보였다.

작품 세계는 가시적(可視的)인 것보다도 인간 내면의 진실을 표출해 내는 데 무게를 두고 있으며, 인간의 희로애락, 생명의 영원성 등을 정제되고 세련된 색채에 담아, 인간상을 마치 상형 문자(象形文字)와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동굴 벽화에 그려진 원시인의 수렵도와 상형 문자 같은 추상 작품은, 초기에는 붉은빛이 더해진 청색과 흰색 여백으로 2차 대전(1939~1945년)과 6⋅25 전쟁이라는 비극적 체험을 담았고, 그 뒤로는 점차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동양의 의식 세계로 규명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정신과 우주의 영원성을 담백하면서도 세련된 색채 감각으로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은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정식 명칭은 국립 조르주 퐁피두 예술 문화 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Pompidou, Paris]의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MNAM, Musée Nationale d’Art Moderne, Paris)⋅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 룩셈부르크 국립 미술관(Luxembourg’s National Museum of History and Art), 이탈리아 토리노 미술관(Museo Civico d’Arte Antica, Torino), 경기도 과천(果川) 국립 현대 미술관(國立現代美術館) 등 국내외의 미술관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수집가들에게 소장되어 있다.

이 밖의 작품으로 [고향의 노인들](1951년)⋅[대화(對話)](1963년, 1975년)⋅[푸른 반영](1972년)⋅[나의 친구를 위한 기념비](1974년)⋅[마스크](1975년)⋅[묵념(黙念)](1978년, 130×162cm)⋅[태고(太古)의 이미지]⋅[푸른 탄생]⋅[흑과 백의 율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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