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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징명(文徵明) -

- 생몰년 : 1470~1559
- 국    가 : 중국


文徵明 1470~1559

중국 명(明)나라(1368~1644)의 문인화가(文人畫家)이며 서예가⋅시인.

이름은 벽(璧), 자(字)는 징명(徵明)⋅징중(徵仲), 호(號)는 형산(衡山).

장쑤성(江蘇省) 창저우[長州, 지금의 우현(吳縣)]에서 태어났다.

1495년부터 1522년까지 10여 차례 과거(科擧)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급제(及第)하지 못하였다.

천성적으로 민감하고 내성적이어서 53세 때인 1523년에야 비로소 그의 학문과 인덕이 세상에 알려져 학구적인 은둔 생활을 버리고 세상에 나와, 조정(朝廷)의 인정을 받고 세공생(歲貢生)으로 베이징(北京)에 부임하여 한림원(翰林院) 대조(待詔)를 제수(除授)받아 [무종실록(武宗實錄)] 편수(編修)에 참여하였다.

3년 뒤인 1526년에 나이 많음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58세 때 ‘옥경산방(玉磬山房)’을 세우고 시(詩)⋅문(文)⋅서(書)⋅화(畫)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림은 같은 고향 사람인 심주(285)에게 배운 외에도 곽희(43)⋅이당(400) 등과 예찬(315)⋅오진(327)⋅왕몽(341)⋅황공망(620) 등 이른바 ‘원말 4대가(元末四大家)’를 배워 그들의 화풍(畫風)을 절충한 경향이 있으나, 그의 본령(本領)은 남종 산수화(南宗山水畫)에 있으며 심주와 함께 남종화 중흥의 중심 인물이었다.

산수⋅화초⋅난죽(蘭竹)⋅인물 등에 뛰어났으며, 특히 산수화는 원(元)나라(1271~1368) 초 서화(書畫)의 천재 조맹부(539)와 ‘원말 4대가’, 그 중에서도 예찬과 왕몽을 이어받아 평범한 구도와 섬세한 묘사, 밝은 색채감과 투명한 필묵법(筆墨法)으로 심주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또한 미술품, 특히 서예 작품 수집가⋅감정가도로 널리 알려졌다. 오대(五代, 907~960)와 송(宋)나라(960~1270)에 활동하였던 옛날 화가들뿐 아니라 원나라의 문인 화가들도 존경하였다. 하나의 화풍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전반적으로 고인(古人)의 화풍 연구와 심사숙고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의 그림은 기법이 다양하여 세부를 꼼꼼히 묘사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유롭게 채색한 것도 있다.

시문(詩文)은 오관(吳寬)에게 배우고, 글씨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는데 왕희지(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의 서예가)⋅조맹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네 가지 주요 서체(書體)인 전서(篆書)⋅해서(楷書)⋅예서(隸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하여 이지적(理智的)이고 정돈감 있는 명쾌한 서풍(書風)으로 대성(大成)하였고, 조맹부⋅축윤명(祝允明, 1460~1526, 중국 명나라의 문인이며 서예가) 이후 제일인자로 오중파(吳中派)를 대표한다.

집안 중에는 문인⋅화가들이 많았는데, 맏아들 문팽(183), 둘째 아들 문가(177), 조카 문백인(179)을 비롯하여 왕곡상(王穀祥)⋅육치(陸治)⋅전곡(錢穀)⋅주천구(周天球)⋅진순(565) 등 많은 문인들의 중심 인물로 심주 이후 쑤저우 화단(畫壇)을 이끌어 오파(吳派, 중국 명나라의 회화 유파. 북종화계의 절파에 대하여, 남종화계 화가를 말한다.)를 확립하였다.

당인(141)⋅서정경(徐楨卿, 1479~1511, 중국 명나라의 시인)⋅축윤명 등과 더불어 ‘오중(吳中) 4재사(才士)’로 불리며, 구영(49)⋅당인⋅심주와 함께 ‘명나라 4대 화가’로 일컬어졌다.

작품으로 [강남춘도(江南春圖)]⋅[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1532년, 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臺北國立古宮博物館>)⋅[누거도(樓居圖)](1543년)⋅[방조백숙후적벽도(倣趙伯驌後赤壁圖)](1548년, 타이베이 국립 구궁 박물관)⋅[산우도(山雨圖)]⋅[송객도(送客圖)](1531년, 스위스, 개인 소장)⋅[진상재도(眞賞齋圖)]⋅[춘심고수도(春深高樹圖)]⋅[화죽(畫竹)]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보전집(甫田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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