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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생광(朴生光) -

- 생몰년 : 1904~1985
- 국    가 : 한국


朴生光 1904. 8. 4.~1985. 7. 18.

한국의 화가.

호(號)는 내고(乃古)⋅그대로.

아버지 박기준(朴基俊)의 둘째 아들로, 경상 남도 진주(晉州)에서 태어났다.

진주 보통 학교(晉州普通學校)를 거쳐 진주 농업 학교(晉州農業學校)를 다녔는데, 이 때 같은 학교에 다니던 불교계의 거목(巨木) 청담[靑潭, 1902~1972, 한국의 승려이며 종정(宗正). 속명(俗名)은 이순호(李淳浩)]과 교유(交遊)하였다.

진주 농업 학교를 다니던 중 1920년 일본 교토(京都)로 가서 다치가와 미술 학원(立川美術學院)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교토 시립 회화 전문 학교(京都市立繪畫專門學校, 지금의 교토 예술 대학교)에 입학하여, 이른바 일본 화단(畫壇)의 ‘근대 교토파(近代京都派)’의 기수(旗手)인 다케우치 세이호(137)⋅무리카미 가가쿠(174) 등에게 새로운 감각의 일본화(日本畫)를 배웠다.

광복이 되자 고향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1950년대 후반에는 김은호(92)의 제자들이 만든 후소회(後素會) 회원들과 대개 국전(國展)에서 소외당하였던 작가들이 모여 1957년 결성한 백양회(白陽會) 등의 동양화 단체에 참여하였으나, 그다지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았다. 당시 화단에서는 식민 잔재 청산 문제, 일본화의 영향 등의 문제로 채색화가 푸대접을 받았다.

20여 년 동안 삶의 뿌리를 내렸던 진주를 떠나 1967년 서울로 온 뒤부터 점차 새로운 예술 세계의 진입을 시도하였다. 일본화의 영향이라는 불명예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민족 회화의 새로운 지평(地平)을 여는 예술적 절정을 보였다. 그의 예술 세계는 무엇보다 채색화에 기초한 민족 회화를 현대적으로 이어받은 점에서 그 뜻이 깊다.

전통 화단이 수묵 문인화(水墨文人畫)의 세계에 머물렀을 때 그는 채색으로 독특한 시각에 따른 조형 어법을 구축하였다. 대개 채색화는 섬약하거나 장식적 효과에 머무는 미인도(美人圖)⋅화조도(花鳥圖) 등 현실 의식이나 시대 정신이 빠진 경우가 대부분일 때였다. 그러나 강렬한 원색의 대담한 화면 구성, 힘있는 필획과 면처리 등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였다.

1967년 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와 경희 대학교(慶熙大學校)에 출강하였다.

오랜 방황 끝에 1970년대 후반부터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하여 1977년에는 진화랑에서, 1981년에는 백상 기념관(百想紀念館)에서, 1984년에는 미술 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82년에는 78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인도(印度)의 불교 유적지와 성지(聖地)를 순례하면서 뉴델리(New Delhi) 인도 미술 협회(印度美術協會)에 초대되어 초대전을 여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로 몰입하였다. 이 점은 그의 예술 세계와 더불어 모범적인 예술가상으로 후진들에게 존경받는 요소이다.

1985년 은관(銀冠) 문화 훈장이 추서(追敍)되었다.

1986년 경기도 용인(龍仁) 호암 미술관(湖巖美術館)에서 열린 회고전(回顧展)은 그의 작품 세계가 총체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초기 일본화적 경향에서 벗어나 한국의 샤머니즘⋅민화(民畫) 등을 주제로 폭넓은 정신 세계를 전통적 색채와 현대적 조형성으로 표현하였다.

조선(朝鮮, 1392~1910) 말기의 시왕도(十王圖)나 감로 탱화(甘露幀畫)와 같은 불교 회화의 전통이 농축되어 재탄생된 불교 소재 그림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받았다. 특히 대중으로부터 ‘미신과 같다’라는 이유로 무시당하였던 무속(巫俗) 세계에 끝없는 애정을 가지고서 독특한 조형 언어로 형상화하였다. 국사당(國師堂) 같은 무당(巫堂)집이나 당대(當代)의 무녀(巫女)를 모델로 하여 여러 점의 무당 그림을 제작하였다. 서구화 일변도의 풍토에서 민족미의 원형을 찾기 위하여 힘썼던 것이다.

무속화 계통은 이어 조선 시대의 민화(民畫)와도 연결되어 재창조되었다. 전통 회화의 재해석에만 그치지 않고 말년에 이를수록 민족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두고 새로운 시각으로 대작 [명성 황후(明成皇后)](1983년) 등의 역사화를 그렸다.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1894~1895)을 소재로 한 역사화와 새로운 무속도를 그려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Grand Palais, 1900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여 만든 건물)에서 열릴 르 살롱[le Salon, 프랑스 미술가전(展)이라는 의미의 관선 미전(官選美展). 살롱 데 자르티스트 프랑세(Salon des Artistes Français)라고 한다.]의 특별 초대 작가로 참가하려고 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남았다. 채색화로서 시대 정신을 더한 독특한 방식의 탐구는 그의 죽음으로 그쳤으나, 독자적인 시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재조명의 대상이 되었다.

작품으로 [모란](개인 소장)⋅[무당](1981년)⋅[무속](1983년)⋅[단청(丹靑)](1984년)⋅[무녀](1984년, 개인 소장)⋅[출가(出家)](1983년, 개인 소장)⋅[토함산(吐含山) 해돋이](1984년) 등이 있으며, 불교 소재의 [청담 대종사(靑潭大宗師)]⋅[혜초(慧超) 스님] 등이 있다.

[청담 대종사]는 고향 동무를 회상(回想)하면서 제작한 대작이고, [혜초 스님]은 인도 여행 등을 단행한 일종의 구도기(求道記)와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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