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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비홍(徐悲鴻) -

중국의 화가이며 예술 교육가.

장쑤성(江蘇省) 이싱현(宜興縣) 지칭차오진(計亭橋鎭)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화가인 아버지 쉬다장(徐達章)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1917년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1918년 베이징 대학교(北京大學校)의 초빙을 받아 화법 연구회(?法硏究會) 지도 강사, 쿵떠 학원(孔德學院) 교수가 되었다.

2년 뒤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 중국의 윤리학자이며 교육가)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국비(國費) 유학을 떠났다. 1919년 5·4 운동(五四運動)의 정신인 과학과 민주 사상을 바탕으로 1920년 <중국화 개량론(中國?改良論)>을 저술하여 ‘옛 화법 가운데 우수한 것은 이어받지만 좋지 못한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며 서양화에서 취할 만한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예술관은 그가 평생 동안 고수한 원칙이었다.

1927년 귀국한 뒤에는 난징(南京)의 국립 중앙 대학교(國立中央大學校) 예술과와 장쑤성(江蘇省) 상하이(上海) 난궈 예술 대학교(南國藝術大學校)에서 교편(敎鞭)을 잡았다. 동시에 어우양위첸(歐陽予?, 1889~1962, 중국의 극작가이며 배우·연극 이론가)·텐한(田漢, 1898~1968, 중국의 연극인이며 극작가·시인) 등과 함께 현실주의(現實主義, realism) 운동을 주창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프랑스·벨기에·독일·이탈리아 등 유럽 여러 곳에서 중국 미술 전람회를 열었고, 1932년 <수묵화(水墨?)>[118×111cm, 프라하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Praha)]를 그렸으며, 1934년에는 러시아를 여행하였다.

1930년대 민족의 수난이 더욱 심해지자 유화(油?)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1930, 349×197cm, 베이징 쉬베이훙 기념관)를 창작하였다. 이 작품은 <사기(史記)> ‘전담열전(田?列傳)’에서 고사(故事)를 취하여 무력(武力)에 굴복할 수 없음을 나타냈다.

1936년에는 광시성(廣西省) 구이린(桂林)에서 미술관을 열었으며, 1937년 다시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의 중앙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에는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인도의 시인이며 철학자·극작가·작곡가)의 요청에 응하여 인도(印度)의 국제 대학교(國際大學校)에서 강의하였고 미술전을 열었다.

중·일 전쟁(中日戰爭, 1937~1945) 동안에 그린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의 신화(神話)를 제재로 삼아, 어려움을 알면서도 전진하는 강한 의지를 칭송하였다.

1946년에는 베이핑 예술 전문 학교(北平藝術專門學校)의 교장이 되었다.

1949년 7월 중국 전문 문학 예술가 대표 대회(中國專門文學藝術家代表大會)에서 중국 문학 예술계 연합회(中國文學藝術界聯合會) 상무 위원으로 뽑혔으며, 전국 미술가 협회(全國美術家協會) 주석(主席)으로 선출되었고, 중앙 예술 학원(中央藝術學院) 원장이 되었다. 전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全國人民政治協商會議)에 초대받아 참석하였으며, 뒤이어 중국 미술 대학교(中國美術大學校)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제2차 중국 문학 예술 활동가 대표 대회에서 참석해 있는 동안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져 죽었다. 그 해 12월 쉬베이훙 기념회(徐悲鴻紀念會)와 유작 전람회(遺作展覽會)가 열렸고 베이징(北京)에 쉬베이훙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그의 작품에는 우의적(寓意的)인 표현과 깊이가 있고, 애국주의(愛國主義)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으며, 예술적으로도 풍부한 창조성을 갖추고 있다. 민족의 우수한 전통을 이어받음과 아울러 서양 예술의 장점을 흡수하였기 때문에 동서의 화법(?法)을 한 곳에 융화시킬 수 있었다. 사실(寫實)을 중시하고 조화를 추구하여 ‘정밀함을 다하여 광대함에 이른다.’고 주장하였으며, 객관적 대상의 미세한 변화를 깊이 관찰하고 다듬고 개괄하여 전체적 통일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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