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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무구(楊无咎) -

- 생몰년 : 1097~1169
- 국    가 : 중국


楊无咎 1097~1169

중국 남송(南宋, 1127~1279)의 화가.

자(字)는 보지(補之), 호(號)는 도선노인(逃禪老人)⋅청이장자(淸夷長者).

한(漢)나라(B.C.206~A.D.220)의 학자 양웅(揚雄, B.C.53~A.D.18, 중국의 시인이며 철학자)의 후손으로, 장쑤성(江蘇省) 칭장(淸江)에서 태어났으며, 장쑤성 예장[豫章, 지금의 난창(南昌)]에서 살았다.

평생 강직하였고 영리(榮利)를 꾀하지 않았으며, 고종[高宗, 1107~1187, 중국 남송의 초대 황제. 헌황제(憲皇帝). 재위 1127~1162] 때는 재상(宰相) 진회(秦檜, 1090~1155, 중국 남송의 정치가)가 여진족(女眞族)의 금(金)나라(1115~1234)에 타협한 것에 불만을 품고, 조정(朝廷)에서 여러 차례 불러들였지만 거절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수묵 인물화(水墨人物畫)는 북송(北宋, 960~1126)의 이공린(393)에게 배웠으며, 매화⋅대나무⋅소나무⋅돌⋅수선화를 잘 그렸는데, 특히 매화 그림이 뛰어났다.

북송 말기에 묵매(墨梅, 수묵화의 매화)의 창시자 화광화상(花光和尙)에게 배운 적이 있었으며, 야생 매화를 잘 그려 휘종(637)은 그를 ‘촌매(村梅)’라고 불렀다.

사물을 보면서 유추하여 그리는 새로운 형상 예술을 만들어 내었다. 화광화상의 붓을 휘갈겨 꽃을 그리는 방법을 변화시켜 묵선(墨線)으로 꽃잎의 윤곽을 그리고 가장 작은 꽃봉오리는 진한 먹으로 점을 찍는 권화법(圈花法)을 창시함으로써 ‘스승을 뛰어넘는(出藍) 영예’를 얻었다.

나무 줄기를 고아하고 힘차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렸는데, 굵은 붓으로 단번에 완성하는데도 젖은 부분과 마른 부분이 적절하게 그려졌다. 그 사이에 비백(飛白, 먹을 적게 하여 붓자국에 흰 잔줄이 생기게 하는 기법. 필획을 그어 나갈 때 빠른 속도와 경쾌함으로 흰 부분이 남게 되며, 다시 필획이 이어지는 화법)을 사용하여 수수하고 얼룩진 듯한 질감(質感)을 그대로 표현하였으며, 나뭇가지를 그리는 운필법(運筆法)은 탄력성이 풍부하여 매우 훌륭하다.

형상은 사실적(寫實的)이며, 윤곽 묘사의 방법을 빌리지 않고 그렸다. 수묵은 형식보다는 내용이나 정신을 그려 내는 데 치중하였으며, 방종함이나 생동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남아 있는 [사매화도(四梅花圖)]⋅[설매도(雪梅圖)]가 대표작이다.

시(詩)⋅사(詞)⋅서예에도 능하였으며, 시⋅사⋅서예의 숙련은 그의 회화 예술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서법(書法)은 구양순(歐陽詢, 557~641,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을 배워서 힘이 넘쳤다. [도선사(逃禪詞)]가 전해져 오는데, 이 사의 격조 역시 힘차면서도 고상하다.

묵매 예술 발전사에서 그의 지위는 매우 높으며, 그 뒤 김농(68)⋅왕면(340)⋅이방응(411)⋅조맹견(538)⋅진헌장(陳獻章, 1428~1500, 중국 명나라의 유학자)⋅탕정중(湯正仲, 중국 남송의 화가. 양무구의 생질) 등 송(宋)나라(960~1270)⋅원(元)나라(1271~1368)⋅명(明)나라(1368~1644)⋅청(淸)나라(1616~1912) 등 역대 묵매의 대가(大家)들이 이룩해 놓은 성취는 모두 그의 업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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