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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현(吳道玄) -

- 생몰년 : 700?~760?
- 국    가 : 중국


吳道玄 700?~760?

중국 당(唐)나라(618~907)의 화가.

어렸을 때의 이름은 도자(道子)인데 현종(玄宗, 685~762,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 재위 712~756)이 도현이라고 고쳐 주었다고 한다.

허난성(河南省) 위센(禹縣) 양자이(陽翟)에서 태어났으며, 외롭고 가난하게 자랐다.

처음에는 지방의 낮은 벼슬아치였으나, 현종에게 그림의 재주를 인정받아 궁정(宮廷) 화가가 되었다.

서예가에 뜻을 두어 장욱(張旭, ?~?,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과 하지장(賀知章, 659~744, 중국 당나라의 시인)에게 배우고, 남조(南朝) 양(梁)나라(502~557)의 장승요(498)를 배워 ‘소화(疎畫)의 체’라는 서화(書畫) 일치의 화체(畫體)를 확립하였다.

후세 화론가(畫論家)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아 그가 원래 어느 정도의 업적을 남긴 화가인지 알 수가 없다. 기록에 따르면 다양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불교를 소재로 한 대형 벽화를 많이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상력과 표현력을 갖춘 기운 찬 필력(筆力)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의 필력에 대해서는 당시의 화론가들조차 칭송을 아끼지 않아 그를 ‘화성(畫聖)’으로까지 평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과 그가 도달하였던 경지를 엿볼 수 있게 해 줄 만한 작품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육조풍(六朝風)의 화려⋅섬세한 필치를 넘어서, 날카롭고 속도감이 있으며 억양이 심한 필치로 단숨에 그림을 그렸다. 굵었다 가늘었다 하는 자유로운 필법(筆法)과 강도가 변화하는 생생하고도 표현력 있는 필선(筆線)을 창출하여, 색을 칠하고 묘사하는 데 매우 까다롭고 조심스러웠던 당시 궁정화와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인식되고 기억되었다.

백묘(白描, 엷고 흐릿한 곳이 없이 먹으로 선만을 그리는 동양화 화법)의 벽화 등이 이 경향을 대표하였는데, 722년 허난성 뤄양(洛陽)과 수도(首都) 창안[長安,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여러 절에 벽화 [금교도(金橋圖)]와 [일장월장경변(日藏月藏經變)]을 그렸다.

742~755년에는 현종의 명을 받아 쓰촨성(四川省) 수저우[蜀州, 지금의 청뚜(成都)]의 자링강(嘉陵江) 300여 리의 경치를 대동전(大同殿)에 하루 사이에 그려, ‘북종화(北宗畫)의 시조(始祖) 이사훈(419) 수월의 공, 오도현 하루의 필적(筆跡)’이라고 일컬어졌던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나무⋅돌⋅땅거죽의 주름을 그리는 동양화 입체 표현의 한 방법인 원근(遠近) 표현의 준법[皴法, 동양화에서 산애(山崖)나 암석의 굴곡 등의 주름을 그리는 화법. 산이나 흙더미 등의 입체감⋅양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동양적 음영법(陰影法)]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묘선적(描線的) 표현인 골법(骨法)도 완비하였는데, 대체로 서역(西域)에서 전하여진 사생적(寫生的) 묘사 기법을 채택하였다.

‘산수의 변은 오도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인물⋅금수(禽獸)⋅대전(臺殿)⋅초목 등 모든 것에 걸친 묘법을 일변시켰고, 동양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역대 명화기(歷代名畫記)]를 비롯하여 [선사공자행교상(先師孔子行敎像)](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 등 회화사상 최고의 평가를 받으나, 그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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