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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위(吳偉) -

- 생몰년 : 1459~1508
- 국    가 : 중국


吳偉 1459~1508

중국 명(明)나라(1368~1644)의 화가.

자(字)는 차옹(次翁)⋅사영(士英), 호(號)는 소선(小仙)⋅노부(魯夫).

후베이성(湖北省) 강하[江夏, 지금의 우창(武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전흔(錢昕)의 집에서 자랐다.

그림을 잘 그려 20세쯤에 궁정(宮廷)으로 들어갔으며, 성화제[成化帝, 1447~1487, 중국 명나라의 제8대 황제. 헌종(憲宗). 재위 1464~1487]는 ‘선필(仙筆)’이라고 부르며 감탄하였다.

인지전(仁智殿) 대조(待詔)가 되었으나, 권문 세가(權門勢家)를 무시하였다는 이유로 참소(讒訴)를 당하여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으로 쫓겨났다.

홍치제[弘治帝, 1470~1505, 중국 명나라의 제9대 황제. 효종(孝宗). 재위 1487~1505] 초기에 다시 조정(朝廷)의 부름을 받아 ‘화장원(畫壯元)’의 인장(印章)을 하사(下賜)받았다. 그러나 조정의 구속에 익숙지 않아 병을 핑계로 난징으로 되돌아갔다. 그 뒤 오랫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정덕제[正德帝, 1491~1521, 중국 명나라의 제11대 황제. 무종(武宗). 재위 1505~1521] 초기에 다시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그 때는 이미 술에 중독되어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성화제를 처음에 배알(拜謁)하였을 때 술에 크게 취하여 손에 먹물을 발라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또 마지막에는 음주(飮酒) 중에 죽었다고 전하여지는 대단한 애주가로, 분방한 생애를 보냈다.

대부분의 시간을 궁정 밖에서 활동하며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자유 분방하고 구속받지 않으면서 하층 민중과 벗하기를 즐겼던 성격은 자신의 작품 속에 잘 스며 있다.

처음에는 오도현(318)과 북송(北宋, 960~1126)의 이공린(393)을 사숙(私塾)하였으며, 백묘(白描, 엷고 흐릿한 곳이 없이 먹으로 선만을 그리는 동양화 화법)에 정통하였고, 종교 인물화 역시 매우 창조적이었다.

화풍(畫風)은 거친 붓으로 주름 등을 넣고, 강렬한 필치를 교묘하게 사용하였으므로 화면이 어수선하고, 그림에 정취가 적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산수화(山水畫)는 대진(143)의 영향을 깊이 받았는데, 대진은 마원(162)과 하규(585)에 비하여 훨씬 개괄적이고 자유 분방하였다. 유난히 대작(大作)을 좋아하였으며, 기세가 웅장하고 필치가 분방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매우 많다. 왕조(汪肇)⋅이저(李著)⋅장로(張路, 1464?~1538?)⋅장숭(蔣嵩, 1500?~?) 등이 모두 그의 화풍을 따라 독자적으로 ‘강하파(江夏派)’를 형성하였다.

대진과 함께 창시한 절파(浙派, 중국 명나라 말기 때 발생한 회화의 한 파)는 명나라 선덕 연간(宣德年間, 1426~1435년)에서 가정 연간(嘉靖年間, 1521~1566년)에 이르는 거의 100년 동안 영향을 미쳤으며, 원파(院派)⋅오파(吳派, 중국 명나라의 회화 유파. 북종화계의 절파에 대하여, 남종화계 화가를 말한다.)와 함께 화단(畫壇)을 빛냈다.

작품으로 [강산만리도(江山萬里圖)]⋅[계산어정도(溪山漁艇圖)]⋅[어락도(漁樂圖)](개인 소장) 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의 영향으로 송(宋)나라(960~1270) 이래 수묵사의(水墨寫意, 사물의 형식보다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함.) 산수화가 새롭게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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