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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 -

- 생몰년 : 1868~1958
- 국    가 : 일본


橫山大觀 1868. 11. 4.~1958. 2. 26.

일본의 화가.

본명(本名)은 사카이 히데마로(酒井秀).

혼슈(本州) 남동부 이바라키현(茨城縣) 미토(水戶)에서 태어났으며, 도쿄에서 죽었다.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일본화과에서 하시모토 가호(589)에게 일본화(日本畫)를 배웠으며,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 1862∼1913, 일본의 미술 비평가이며 도쿄 미술 학교 교장)의 총애를 받았다.

1896년부터 모교(母校)의 조교수로 디자인을 가르쳤으나, 오카쿠라 가쿠조가 교장에서 물러나자 그도 학교를 떠났다.

1897년 일본 회화 협회(日本繪畫協會) 제2회전에 출품한 [무아(無我)]로 동상(銅賞)을 받았다.

1898년 동무인 시모무라 간잔(267)과 히시다 슌소(菱田春草, 1874~1911, 일본의 화가) 등 여러 화가들과 함께 일본 미술원(日本美術院) 창립에 참가하였고,

1898년 오카쿠라 가쿠조와 시모무라 간잔(267)⋅하시모토 가호(589)⋅히시다 슌소(菱田春草, 1874~1911, 일본의 화가) 등 여러 화가들과 함께 일본 미술원(日本美術院) 창립에 참가하였고, [굴원(屈原)](1898년)⋅[미아(迷兒)](1902년) 등을 발표하였다.

초기에는 선(線)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전통 일본화 기법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히시다 슌소와 함께 선을 생략하는 대신 색상의 배합에 중점을 두는 무선 묘법(無線描法)이라는 새로운 회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양식에는 ‘모로타이(朦朦體)’라고 하는 경멸적인 별명이 붙여졌다. ‘모로(朦朦)’라는 말은 모호하고 특색이 없는 것을 뜻하지만 당시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욱 강하였으며, 이를테면 ‘모로 샤후(朦朦車夫)’는 ‘불량스러운 인력거꾼’을 이르는 말이었다.

1907년 창설된 문부성(文部省) 주최의 미술 전람회(文展) 심사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전람회의 내부적인 분규로 심사 위원직을 사퇴하였고 그 뒤 일본 미술원을 재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일본 미술원은 오카쿠라 가쿠조가 죽자 문을 닫은 상황이었다.

1914년 재건된 일본 미술원은 ‘원전(院展)’이라고 불리는 전시회를 해마다 열었는데, 정부 주도가 아닌 이 전시회는 젊은 화가들에게 중요한 등용문(登龍門)이었다.

중기 이후에는 수묵화(水墨畫)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적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의 전통을 강조하였으며, 히시다 슌소와 함께 근대 일본에서 전통 일본화를 부활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작품으로 [밤벚꽃(夜櫻)]⋅[산길(山路)]⋅[유인유여지(遊刃有余地)](1914년)⋅[생생유전(生生流轉)](1923년, 도쿄 국립 박물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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