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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공린(李公麟) -

- 생몰년 : 1049?~1106
- 국    가 : 중국


李公麟 1049?~1106

중국 북송(北宋, 960~1126)의 문인화가(文人畫家)이며 미술품 감정가(鑑定家).

자(字)는 백시(伯時), 호(號)는 용면(龍眠).

법서(法書)⋅명화(名畫)를 가지고 있는 명문(名門) 집안으로, 안후이성(安徽省) 수청(舒城)에서 태어났다.

1070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 지방관을 비롯하여 조봉랑(朝奉郞)⋅중서문하(中書門下)를 거쳐 성산정관(省刪定官)에 이르렀으나, 병을 얻어 1100년에 퇴관(退官)하였다. 그 뒤 향리 근처의 용면산(龍眠山)에 은거하며 스스로 용면거사(龍眠居士)라고 일컬으며 회화 삼매(繪畫三昧)의 여생을 보냈다.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중국 북송의 시인이며 정치가. 소식(蘇軾)]와 미불(187) 등을 비롯한 당대(當代)의 명인(名人)들과 교유(交遊)하였다. 또한 옛 대가(大家)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모사(模寫)함으로써 높은 안목을 갖게 되었다.

명승지 탐방을 낙으로 삼았고, 문인⋅명승(名僧)들과 교유하였으며, 황정견(630)은 ‘풍류를 즐기던 옛 사람에게 못지않다.’고 그를 평하는 등 북송 시대에 사대부(士大夫)들로부터 크게 칭송받았다.

박학다식하고, 불교 이론에도 통하였으며, 옛 동기(銅器)를 많이 수집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또 많은 기자(奇字)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증(考證)에 능하였고, 서예는 진(眞)⋅행(行)⋅초(草)에 뛰어나 진송(晉宋)의 풍격을 갖추었다.

그림은 고개지(29)⋅육탐미(378)⋅장승요(498)를 비롯한 전대(前代)의 대가들을 연구하여, 화가로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림을 그릴 때 사물 형태의 단순한 묘사와 직업적인 기술을 거부하고 고전 미술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그 양식의 범주 안에서의 자기 표현을 대단히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문인화에서 추구하는 이상(理想)이었다.

통상적으로는 문인적 취향에 따라 스케치풍의 그림을 그의 화풍(畫風)으로 들고 있지만, 채색을 쓰지 않고 매우 꼼꼼하고 세련된 필선(筆線)으로만 인물이나 건축물을 그리는 백묘화법(白描畫法, 엷고 흐릿한 곳이 없이 먹으로 선만을 그리는 동양화 화법)과도 연관지어지고 있다.

그의 회화의 본령(本領)은 소동파가 칭찬한 것처럼 말[馬]을 그리는 데 있었으며, 오랜 전통이 있는 백묘화법을 부흥하기도 하였다.

작품 가운데 그의 확실한 진적(眞跡)으로 여겨지는 [오마도권(五馬圖卷)]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그 뒤의 많은 회화 양식과 화론(畫論)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마화(馬畫,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불화(佛畫)⋅산수화⋅인물화 등 여러 방면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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