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ㅇ>이>이응로  

인쇄 하기  html이나 txt파일로 저장 합니다.  원하시는 곳에 붙여넣기 하세요.  글자 크기 크게 글자 크기 작게
- 이응로(李應魯) -

- 생몰년 : 1904~1989
- 국    가 : 한국


李應魯 1904. 1. 12.~1989. 1. 10.

한국의 동양화가.

호(號)는 고암(顧庵)⋅죽사(竹史). 본관(本貫)은 전의(全義).

충청 남도 홍성(洪城)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 파리에서 죽었다.

1924년 서울로 가서 서화(書畫)의 대가(大家) 김규진(65) 문하(門下)에서 서예⋅사군자(四君子)⋅묵화(墨畫) 등을 배웠으며, 그 해 제3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묵죽(墨竹)]⋅[청죽(靑竹)]⋅[풍죽(風竹)] 등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35년 일본으로 가서 일본 남화(南畫)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柱月)의 지도를 받았으며, 혼고 회화 연구소(本鄕繪畫硏究所)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였다.

1938년부터는 수묵 담채(水墨淡彩)의 사실적(寫實的)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그 해 제17회 선전(鮮展)에서는 이왕직상(李王職賞)을 받았고, 그 뒤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 화원전(畫院展)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하였다.

1938년 새로운 그림 수업을 위하여 일본으로 가서 도쿄 가와바타 화학교(東京川端畫學校)와 혼고 회화 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에서 일본화법과 서양화의 기초를 익히며 기량을 넓혔다.

1939~1944년 도쿄의 일본 화원전(日本畵院展)에 참가, 입선과 특선을 하였다.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고, 1946년에는 김영기(82)⋅김중현(103)⋅배렴(208)⋅이유태(447)⋅장우성(499)⋅조중현(550) 등과 함께 단구 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전통적 한국화(韓國畫)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으며, 그 해 3월 첫 회원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대한 미술 협회(大韓美術協會, 美協) 상임 위원을 맡은 등 재야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무렵부터 현대적 수묵화 작업으로 자연 풍경과 향토적인 인물 풍경 또는 동물⋅새 등을 화재(畵材)로 삼아 독특한 붓놀림의 창작을 시도하여 1950년대의 분방하고 자유로운 독자풍으로 이어졌다.

1948년 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서라벌 예술 대학교(지금의 중앙 대학교 예술 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 때의 작품으로 [노우(怒牛)]⋅[봄]⋅[비원(祕苑)]⋅[새]⋅[숲] 등이 있는데, 서민상⋅풍경⋅전쟁 체험 등을 형상화한 것이다.

1957년 조선 일보사(朝鮮日報社) 주최 제1회 현대 작가 미술전에 참가하였고, 1958년 서울 소공동(小公洞) 중앙 공보관(中央公報館)에서 ‘도불(渡佛) 기념전’을 마치고 부부 관계였던 제자 화가 박인경(朴仁京)과 더불어 독일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파리에서는 그 동안의 수묵화 한계를 과감히 벗어난 서구 미학의 콜라주[collage, 풀로 붙인다는 뜻으로 1912~1913년쯤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 프랑스의 화가)와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973, 에스파냐의 화가) 등의 입체파가 유화의 한 부분에 신문지나 벽지⋅악보 등 인쇄물을 풀로 붙였는데, 이것을 ‘파피에 콜레(papiers collés)’라고 불렀다.]로 파격적인 변신을 나타내었다. 서울에서 가져간 화선지 외에 버려진 모든 종이를 재질삼아 콜라주로 형상시키고 바탕도 무엇이든 이용한 그 실험적인 조형 행위는 먹물 또는 은근한 색상 부여로 동양적인 정신성과 은밀한 형상 창조로 곧 국제적 평가와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들은 1965년 무렵까지 ‘콩포지시옹(Composotion)’이라는 단일 명제가 붙여졌다.

1962년 파리 파케티 화랑(Galerie Facchetti)에서 평론가 라세뉴(Jacques Lassaigne)의 주선으로 콜라주전을 열었는데, 이 화랑을 통하여 1960년대 후반까지 콜라주 기법과 자유로운 수묵 담채 형상의 작업을 추구하였다. 그 뒤 10년 동안 문자 추상(文字抽象, 한글⋅한자의 서예적 추상) 작업을 시도하였고, 파리와 독일⋅스위스⋅덴마크 등지의 여러 화랑 및 미술관에서 이 작품들이 초대 전시되었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Biennale)에서 명예 대상(大賞)을 차지하여 주목받았으며, 이 해부터 파리에 동양 미술 연구소(東洋美術硏究所)를 열어 묵화(墨畫)⋅서예 등을 가르쳐 3,0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이 무렵의 약 10년간을 스스로 ‘사의적 추상 시기(寫意的抽象時期)’, 그에 이은 1980년대 초까지를 ‘서예적(書藝的) 추상 시기(흔히 문자 추상이라고 한다.)’로 제작 의도와 조형적 표상성의 창조적 변화와 집중성을 나타내었다. 모두 동양적 표현 정신과 밀착된 특질로 국제적 위상을 실현시켰다.

1967년에는 6⋅25 전쟁 때 월북(越北)한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독일 동(東)베를린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과 만난 것이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東伯林事件)’에 연루, 반공법(反共法)에 위반되어 서울로 붙잡혀 와 무기 징역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 주선으로 1969년 특별 사면(赦免)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이 일로 말미암아 국내 화단(畫壇)과는 단절되었으나, 스위스와 프랑스에 이어 일본⋅미국⋅벨기에를 중심으로 몇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5년 서울 현대 화랑(現代畫廊)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 화랑에서 신작 [무화(舞畫)]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1977년 파리에서 백건우(白建宇, 1946~, 한국의 피아니스트)⋅윤정희(尹靜姬, 1944~, 한국의 영화 배우) 부부의 북한 납치 미수 사건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1981년부터는 종래의 추상 형식에서 구상적(具象的) 표현으로 돌아가,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주제로 삼은 ‘시위 군중’ 소재의 대대적인 수묵화 연작(聯作)에 열중하여, [인물 군중상(人物群衆像)](1985년) 등 긴박한 움직임이 있는 화면을 통한 의중(義衆)의 시각적 발언을 시도하였다.

파리 정착 이후 작품은 대부분 제목이 없이 발표되었으며, 1983년 프랑스에 귀화(歸化)하였다.

1985년 도쿄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9년 경기도 용인(龍仁) 호암 미술관(湖巖美術館)에서 초대전이 열리던 중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1923년부터 시작하여 죽기 직전까지 60여 년 이상 왕성한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작품 경향은 시기에 따라 몇 단계로 나눌 수 있으나, 대체로 동양의 사의적(寫意的, 외형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그린다는 뜻으로, 수묵화나 문인화가들이 이러한 경지를 추구하였다.)인 서화(書畫) 개념을 서양의 추상적 표현과 접목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나는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인 1923~1934년에는 김규진의 문하생으로 서예와 묵화를 배우고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양화의 필획을 섭렵하던 시기였고, 이것은 그 뒤의 작품에 근원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45년까지 일본 남화의 영향을 받아 간결한 갈필(渴筆, 붓에 먹물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서 그리는 동양화 묘법)의 묘사와 함께 실경(實景)을 중시하는 사상적인 회화를 남겼다.

1945~1958년에는 단구 미술원을 조직하는 등 민족적인 한국화를 추구하였다. 이 때에는 문인화(文人畫)의 전통 속에서 보이는 사의를 바탕으로 일상적인 소재를 힘차고 자유 분방한 필획과 발묵(潑墨)의 효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그림을 그는 ‘반(半)추상’이라고 하였는데 서양의 추상 회화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1958년 프랑스에 간 뒤 콜라주 기법을 발전시켰다. 이 작업은 196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물질의 결합’이라는 논리 아래 화선지나 신문, 잡지 등을 찢거나 구겨 붙이면서 나타나는 표면의 색상과 먹물의 은근한 번짐을 조화시키는 것으로 콜라주 기법의 물질적 표현성에 주목하였던 시기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말까지는 주로 동양의 문인화에서 보이는 사의적 정신성을 국제적인 조형 방식인 추상 형식과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서예적 추상’ 또는 ‘문자 추상’이라고 부르는 이 시기의 회화는 한자나 한글의 형상을 자유롭게 나열하여 암시적인 형태를 나타내거나 명확한 윤곽의 선(線)으로 표현하는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구성을 보여 준다.

그 뒤 1989년까지는 그가 겪었던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바탕을 둔 문제에 관심을 지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무화]에서 보여 준 먹과 붓의 용필로 응축된 사물의 표현 기법을 발전시켜 대형 화면에 인물 군중의 움직임을 표현한 회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이는 사의적인 필법(筆法)의 세계에서 벗어나 민중의 움직임을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적인 관심을 화면에 옮기려고 하였던 시도로 해석된다.

충청 남도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사천리에는 1996년 11월 30일 충남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이응로 선생 사적지(李應魯先生事蹟地)’가 있다. 이 곳은 그가 1944년에 구입하여 6⋅25 전쟁 때 피난처로 사용한 곳이다. 이 곳에서 수덕사(修德寺)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다. 수덕 여관(修德旅館) 앞 바위 조각은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하였을 때, 고향 산천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문자적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의 삶과 예술을 추모하여, 2000년 11월 1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平倉洞)에 이응로 미술관(李應魯美術館, Ungnolee Museum)을 열었으나, 2005년 7월 4일 재정난으로 폐관되었고, 2007년 1월 아내 박인경이 대전(大田) 서구(西區)에 이응로 미술관을 다시 열었다.

상위  이전  다음


제작 : 동방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