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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李鍾禹) -

- 생몰년 : 1899~1981
- 국    가 : 한국


李鍾禹 1899. 12. 22.~1981. 2. 7.

한국의 서양화가.

호(號)는 설초(雪蕉).

대지주(大地主)였던 아버지 이태건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서 죽었다.

1913년 평양 고등 보통 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고, 1915년 공진회(共進會) 미술 전람회에 수채화로 입선하면서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1917년 일본으로 가서 간사이 미술 연구소(關西美術硏究所)를 거쳐 1923년 일본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하고, 1923년부터 중앙 고등 보통 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지금의 중앙 중⋅고등 학교)의 도화(圖畫) 교원 및 교감을 지냈다.

1924년 제3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자화상(自畫像)]과 [추억(追憶)]을 출품하여, [추억]이 양화부 3등상을 받았다. 그 뒤 선전(鮮展)에는 출품하지 않았다.

도쿄 미술 학교 졸업 전후의 작품으로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초상(肖像)]과 향리의 풍경인 [구월산 원경(九月山遠景)], 사진 도판(圖版)으로만 전하고 있는 1924년 선전 출품작 [자화상]과 [추억]이 있다. 이 시기의 작품 경향은 [구월산 원경]⋅[초상] 등이 습작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자화상]과 [추억]은 엄격한 구도와 정감적인 대상 파악 등 당시 일본 관학파(官學派)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고 있다.

1925년 우연한 계기로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로 가서 벨로루시인(人) 슈하이에프 연구소에서 고전적인 서양화법의 정확한 소묘(素描)와 사실적(寫實的)인 묘사를 배웠다.

파리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남자 나체상](1926년)⋅[루앙 풍경](1926년)⋅[응시(凝視)](1926년)⋅[모부인상(某婦人像)](1927년)⋅[독서하는 우인]⋅[돌아선 나부(裸婦)] 등 일련의 인물 소재의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주로 사실적인 묘사를 기초로 하여 조형성을 갖춘 작품으로 해부학적인 대상 파악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27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프랑스 미술 전시회. 가을 살롱 또는 가을전)에 [모부인상]⋅[인형이 있는 정물(靜物)](1927년) 등을 출품하여 입선되는 등 생애 중 가장 활발하게 그림에 전념하였다.

귀국한 뒤인 1928년 동아 일보사(東亞日報社) 주최로 귀국 개인전을 열어 파리 시절의 작품 53점을 선보였다.

한동안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 경신 학교(儆新學校), 평양의 소성회(塑星會) 회화 연구소, 중앙 고등 보통 학교에서 후진 지도에 힘썼다.

1933년 서화 협회(書畫協會) 간사(幹事)가 되었으며, 1934년에는 목일회(牧日會)를 조직하였다. 목일회는 일제(日帝) 강점기에 결성되어 활동하였던 서양화가들의 단체로, 서울 종로(鐘路)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에서 제1회 작품전을 가졌다. 그러나 단체의 이름이 일본을 배격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사용 금지당함에 따라 모임이 해체된 상태였다가, 1937년 이름을 목시회(牧時會)로 바꾸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회원은 이종우를 비롯하여 구본웅(47)⋅길진섭(60)⋅김용준(86)⋅백남순(211)⋅송병돈(宋秉敦, 1902~1967, 한국의 화가)⋅신홍휴(申鴻休, 1911~1961, 한국의 화가)⋅이마동(407)⋅이병규(412)⋅임용련(486)⋅장발(495)⋅황술조(623) 등 주로 도쿄 미술 학교 출신이었다. 그림의 성향은 대개 일본 양화(洋畫)의 기법을 따르는 보편적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와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범주였으나, 파리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순수주의(純粹主義, purisme) 사조(思潮)를 따르는 야수파(野獸派, fauvisme<Wild Beasts>)적인 표현이나 과감한 반전통적 방법을 시도하는 성향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사회적 배경과 양화에 대한 인식의 저하를 극복하지 못하고,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단체였던 목시회는 1938년 ‘9인 양화 동인전’을 끝으로 활동을 마감하였다.

그 뒤 서화 협회 전람회(協展)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나부(裸婦)](1935년)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화단(畫壇)의 형성에 이바지하였을 뿐 더 이상 작품의 발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광복 직후 조선 미술 건설 본부(朝鮮美術建設本部) 서양화부 위원과 조선 미술 협회(朝鮮美術協會) 부회장을 지냈다.

1949년부터 시작된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에서 계속 심사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51년부터는 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 교수⋅학장 등을 지냈다.

광복된 뒤의 활동 무대는 주로 국전(國展)과 1958년에 창립된 목우회(木友會), 1969년에 창립된 사실화가회(寫實畫家會) 등이었으며, 국립 현대 미술관(國立現代美術館) 주최의 ‘근대 미술 60년전’⋅‘현역 화가 100인전’ 등의 초대전을 열었다.

이 무렵에는 다시 정감적인 소재 해석과 자연 관조(自然觀照)의 동양적인 취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면서 파리 체류시의 작품과 극단의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1952년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文總) 부회장에 선임되었고, 1960년 예술원(藝術院) 회원이 되었으며, 1961년 예술원상, 1962년 문화 훈장 대통령장, 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1974년 동아 일보사 주최로 회고전(回顧展)을 열었으며, 화집(畫集)도 출판하였다. 이 때 파리 유학 시절의 많은 작품이 발굴, 전시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작품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으나 이전의 고전적인 사실주의 작품에서 벗어나 사생(寫生)을 중심으로 한 풍경화를 주로 제작하였다. 특히 만년(晩年)에 이르러 야외 사생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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