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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본웅(具本雄) -

- 생몰년 : 1906~1953
- 국    가 : 한국


具本雄 1906. 3. 7.~1953. 2. 2.

한국의 서양화가.

호(號)는 서산(西山).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 곳에서 죽었다.

어려서 가정부의 실수로 등뼈를 다쳐 곱추가 되었다. 화가의 길이 곧 숙명(宿命)이라고 여겨 18세(1924년) 때 고려 미술 연구회(高麗美術硏究會)에 들어가, 우리 나라 서양화 제1세대로 파리에서 공부한 이종우(464)에게 서양화를 배웠다.

이듬해 YMCA 청년 학관(靑年學館) 미술과에서 김복진(金復鎭, 1901~1940, 한국의 조각가이며 미술 평론가⋅문예 이론가⋅연극인⋅사회 운동가. 우리 나라 최초로 서구식 조각 교육을 받았다.)에게 조각을 배웠다. 경신 고등 보통 학교(儆新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한 이듬해인 1927년 제6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 조각부에서 [머리 습작]을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다.

1928년 일본으로 가서 도쿄 가와바타 화학교(東京川端畫學校)를 거쳐 1929년 니혼 대학교(日本大學校) 전문부 미학과(美學科)를 졸업하였다.

1930년 자유로운 화풍(畫風)을 펼치던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 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 다시 입학하여, 주로 도쿄에서 열린 이과전(二科展)⋅독립전(獨立展)⋅다이헤이요전(太平洋展) 등의 전위적(前衛的)인 공모전에서 입상하였다.

1931년에는 도쿄에서 김응진(金應進)⋅이마동(407) 등과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였다.

1933년 다이헤이요 미술 학교 본과(本科)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김유정(金裕貞, 1908~1937, 한국의 소설가)⋅이상(李箱, 1910~1937, 한국의 시인이며 소설가) 등과 친분을 두텁게 하는 한편, 문화의 불모 상태에 있던 일제(日帝) 강점기에는 모더니즘 미학의 토착화 작업에 몰두하였고, 우리 나라 최초로 1918년 창립된 순수 근대 미술 동인회(同人會)인 서화 협회(書畫協會) 전람회(協展)에 출품하였다.

순수 미학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으며, 당시 출세의 지름길인 선전(鮮展)을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관전(官展)에 대해서도 ‘선장(船長) 없는 기선(汽船)’이라고 혹평하였다. 또한 예리한 비평적 안목으로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미술과 문화적 활동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미술의 원점과 한계를 알려 주는 현주소이기도 하였다.

1934년 목일회(牧日會)를 창립하여 왕성한 전위 미술 운동을 전개하였다. 목일회는 일제 강점기에 결성되어 활동하였던 서양화가들의 단체로, 서울 종로(鐘路)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에서 제1회 작품전을 가졌다. 그러나 단체의 이름이 일본을 배격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사용 금지당함에 따라 모임이 해체된 상태였다가, 1937년 이름을 목시회(牧時會)로 바꾸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회원은 구본웅을 비롯하여 길진섭(60)⋅김용준(86)⋅백남순(211)⋅송병돈(宋秉敦, 1902~1967, 한국의 화가)⋅신홍휴(申鴻休, 1911~1961, 한국의 화가)⋅이마동(407)⋅이병규(412)⋅이종우⋅임용련(486)⋅장발(495)⋅황술조(623) 등 주로 도쿄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출신이었다. 그림의 성향은 대개 일본 양화(洋畫)의 기법을 따르는 보편적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와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범주였으나, 파리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순수주의(純粹主義, purisme) 사조(思潮)를 따르는 야수파(野獸派, fauvisme<Wild Beasts>)적인 표현이나 과감한 반전통적 방법을 시도하는 성향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사회적 배경과 양화에 대한 인식의 저하를 극복하지 못하고,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단체였던 목시회는 1938년 ‘9인 양화 동인전’을 끝으로 활동을 마감하였다.

한편 1930년대 국내 화단(畫壇)에서는 구본웅⋅김환기(112)⋅유영국(372)⋅이중섭(467)이 야수파⋅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us)⋅입체파(立體派, cubism)⋅추상 회화(抽象繪畫) 등 서구의 전위적 화풍을 소개하였다. 이 제2세대 화가들의 등장은 도쿄 미술 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아카데미 화단에 큰 변화의 계기를 주었다. 이들은 학연(學緣)이나 지연(地緣)에 따른 단체 결성에서 벗어나 유파(流派)나 이념으로 결속되어 보다 심화된 미의식을 보여 주었다.

1938년 6월에는 문화⋅취미 미술 잡지 [청색지(靑色紙)를 발간하는 한편, 정판사(精版社)를 경영하였다.

일제 말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나마 자유로운 미술 활동을 통하여 개인적 자아의 확인을 모색하던 국내 화단의 분위기는 미술 활동이 위축되면서 친일(親日) 성향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1942년 화신 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양화가의 수묵화전(水墨畫展)을 끝으로 붓을 놓기에 이르렀다.

광복 직후에는 조선 미술 건설 본부(朝鮮美術建設本部)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미군정청(美軍政廳) 문교부 편수국(編修局)의 미술 과목 편수사로 미술 교과서 편찬에 참가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에 추천 작가가 되었으나 출품을 거부하였으며, 1953년 피난지 부산(釜山)에서 서울로 와서 [서울 신문] 제작에 참여하여 삽화 등을 그렸다. 이 해 2월 47세의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죽었다.

1954년 서울의 천일 화랑(天一畫廊)에서 김중현(103)⋅이인성(453)과 함께 3인 유작전(遺作展)이 열렸다.

아카데미즘으로 고착된 1930년대 화단의 일상성을 거부하고 개성적인 표현 세계를 개척한 인물로 ‘한국 야수파 화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작품 경향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지적(知的)이고 분석적이다.

작품으로 [여인(女人)](1930년쯤, 35×46cm,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동무 이상(李箱)](1930년대)⋅[비파(琵琶)와 포도(葡萄)](1930년대)⋅[정물(靜物)]⋅[친구의 초상](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등이 있다.

한편, 1936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이상을 취직시켰고, 이 해 6월을 전후하여 이복 동생 김향안(金鄕岸, 1916~2004)이 이상과 결혼하였다. 김향안은 본명(本名)이 변동임(卞東琳)으로, 경기 여자 고등 학교(京畿女子高等學校)와 이화 여자 전문 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한때 수필가로 필명(筆名)을 날렸으며, 재능과 미모로 당시 문화계에서 요정(妖精) 대접을 받았다.

1936년 18세에 시인 이상을 만나 결혼하였고, 그가 27세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날 때 임종(臨終)을 지켰다. 1944년 5월 화가 김환기와 재혼하였고, 1955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가 196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 정착하였다.

1974년 김환기가 죽은 뒤, 뉴욕에서 남편의 남아 있는 작품과 유품(遺品)을 관리하며 살았으며, 1992년 서울 부암동(付岩洞)에 남편의 이름을 딴 ‘환기 미술관(煥基美術館)’을 건립하였다. 2004년 2월 29일 88세로 타계, 뉴욕 교외(郊外) 웨스트체스터(West Chester)의 공동 묘지에 있는 김환기의 묘소 옆에 안장(安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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