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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업(張承業) -

- 생몰년 : 1843~1897
- 국    가 : 한국


張承業 1843(헌종 9)~1897(광무 1)

조선(朝鮮, 1392~1910)의 화가.

자(字)는 경유(景猷), 호(號)는 오원(吾園)⋅취명거사(醉瞑居士)⋅문수산인(文峀山人), 본관(本貫)은 태원(太原).

선세(先世)가 무반(武班)이었으나, 어려서 고아로 자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집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서울에 정착한 뒤 청계천(淸溪川) 수표교(水標橋) 근처에 살던 역관(譯官) 이응헌(李應憲) 또는 변원규(卞元圭, ?~?, 조선의 문신)의 집에 기식(寄食)하면서 글공부를 하였고, 중국 원(元)나라(1271~1368)⋅명(明)나라(1368~1644) 이래의 명적(名籍)을 접하고 스스로 익혀 어느 날 문득 화리(畫理)를 터득하고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었다.

화명(畫名)이 날로 높아져 왕실에서는 그를 대령화원(待令畫員)으로 불러들여 그림 병풍을 제작하게 하였으며, 이 때 감찰(監察)이라는 정6품 벼슬을 임시로 제수(除授)하였다.

술을 몹시 즐겨 아무 주석(酒席)에나 가서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주었으며, 여자를 몹시 좋아하였고, 특히 어떤 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궁궐에서 세 차례나 도망친 일화(逸話)를 남겼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40대 무렵부터는 오경연(吳慶然, 1841~?) 등의 역관 중인(中人) 계층과 김영(81) 등의 여항 문인(閭巷文人)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창작 활동을 하였으며, 녹청색 창의(彰衣) 차림의 특이한 모습으로 그림 판 돈을 술집에 맡겨 놓고 날마다 들러서 마시면서 취한 상태로 지냈다. 이러한 기질은 강렬한 필법(筆法)과 묵법(墨法),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設彩法)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기명 절지(器皿折枝)⋅산수(山水)⋅인물⋅사군자(四君子)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는데, 전반적으로 문기(文氣)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이 돋보인다.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겨 김홍도(110)⋅안견(292)⋅정선(522)과 함께 ‘조선 시대의 4대 화가’로 일컬어지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삼원삼재[三園三齋, 단원(檀園) 김홍도⋅혜원(蕙園) 신윤복(277)⋅오원 장승업, 현재(玄齋) 심사정(281)⋅겸재(謙齋) 정선⋅관아재(觀我齋) 조영석(545), 조영석 대신에 공재(恭齋) 윤두서(380)를 넣기도 한다.]’의 한 사람이다.

산수에서는 예찬(315)⋅오진(327)⋅왕몽(341)⋅황공망(620) 등 이른바 ‘원말 4대가(元末四大家)’와 청(淸)나라(1616~1912) 초의 ‘사왕오운(四王吳惲)’ 계통의 각종 남종화(南宗畫)풍과 각체의 북종화(北宗畫)풍을 함께 소화하여 그렸으며, 중년부터 특유의 기이하고 웅장한 외관, 복잡한 구도와 더불어 점차 북종 원체(院體)적인 장식화의 경향을 나타냈다.

인물과 영모(翎毛, 새와 짐승 등을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도 역동적인 구도, 사실적(寫實的)인 묘사와 화려한 설채를 특징으로 하였는데, 만년(晩年)으로 갈수록 전문적인 기교를 강조하는 화풍(畫風)을 보였다.

기명 절지에서는 청나라 말의 우창숴(357)⋅조지겸(551) 등의 화풍과 근대 감각이 깃든 명암법(明暗法, chiaroscuro, 대상의 형태를 관찰하여 빛의 현상에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 관계 및 그 변화를 파악하여 입체감 있게 표현하는 방법. 음영법)을 수용하였다.

한편 선지(宣紙) 사용법의 보급과 함께 이에 적합한 부드럽고 긴 양털붓 기법을 개발하여 전파하였다. 이러한 작품 세계와 화풍 등은 안중식(300)⋅이도영(403)⋅조석진(542) 등에게 이어져 한말(韓末)과 일제(日帝) 강점기의 전통 화단(畫壇)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윤비[尹妃, 1894~1966, 순종(純宗, 1874~1926, 조선의 제27대 왕이며 최후의 왕. 재위 1907~1910)의 계비(繼妃).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친정 집안 친척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전하여지는 [영모십곡병(翎毛十曲屛)](1894년쯤, 모두 10폭, 각 폭 39.5×150cm, 개인 소장)은 [영모절지병풍(翎毛折枝屛風)]이라고도 하는데, 김용준(86)은 [오원실사(吾園實事)]에서 ‘갑오년간(1894년쯤) 오원(吾園)은 평생 보지도 못한 원숭이를 그려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당시 화단에서는 그에 관한 일화와 신기(神技)에 가까운 그림 재주가 종종 화젯거리가 되었다.

작품으로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40.3×142.2cm,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군마도(群馬圖)]⋅[귀거래도(歸去來圖)](서울 간송 미술관)⋅[노안도(蘆雁圖)](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담채산수(淡彩山水)]⋅[산수도](서울 간송 미술관)⋅[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152×69cm, 서울 간송 미술관)⋅[수상서금도(樹上棲禽圖)]⋅[쌍치도(雙雉圖)]⋅[어옹도(漁翁圖)]⋅[청록산수도(靑綠山水圖)]⋅[침양송객도(浸陽送客圖)]⋅[포대도(包袋圖)]⋅[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210.3×40.6cm, 서울 대학교 박물관)⋅[호취도(豪鷲圖)](55.3×135.5cm,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홍백매 십정병(紅白梅十幀屛)]⋅[화조곡병(花鳥曲屛)]⋅[화조수도(花鳥獸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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