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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요(張僧繇) -

- 생몰년 : ?~?
- 국    가 : 중국


張僧繇 ?~?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502~557)의 화가.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우셴(吳縣)에서 태어났다.

관리(官吏)로 천감 연중(天監年中, 502~519년)에 무릉국(武陵國) 시랑(侍郞)이 되었고, 나중에 우장군(右將軍)⋅우싱(吳興) 태수(太守)에 이르렀다.

무제(武帝, 464~549, 중국 양나라의 창건자이며 초대 황제. 재위 502~549)는 당시 융성해진 불교를 장려하여 절을 짓고 그 탑묘(塔廟)를 장식하였는데, 늘 장승요에게 벽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불화(佛畫)⋅도석 인물화[道釋人物畫, 신선(神仙)이나 불교의 고승(高僧)⋅나한(羅漢) 등의 인물을 그린 그림, 道釋畫]를 장대한 규모로 그렸다.

인물 고사화(高士畫)⋅종교화⋅초상화⋅풍속화를 잘 그렸는데, 인물화는 구도 의장, 색채 조형에서 기교가 있고 치밀하며 사실적(寫實的)이다. 매우 가는 선(線)에 의한 생략적인 형체 가운데 뜻이 넓게 충만하는 골법(骨法) 형체라고 일컬어졌다.

그의 불상(佛像)은 독자적인 양식을 이루어 ‘장가양(張家樣)’이라고 불리면서 조소가(彫塑家)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오도현(318)의 ‘오가양(吳家樣)’ 이전에 가장 광범위하게 유행한 풍격이었다. 또한 동서고금의 각종 인물의 모습과 복식(服飾)을 매우 진실하고 생동감 있게 그렸다.

6법을 겸비한 화가로, 동진(東晉, 317~419)의 고개지(29)와 남조 송(宋)나라(420~478)의 육탐미(378)와 함께 칭송되었는데, 오도현 이전의 2,300년 동안 가장 명성이 높았으며, 세 사람 가운데에서는 감각면에서 가장 빼어났다.

고개지⋅육탐미와 함께 ‘육조(六朝)의 3대가(大家)’라고 일컬어지며, 장언원(張彦遠, 815~879, 중국 당나라의 서화론가)이 중국의 화가 371명의 전기(傳記)와 함께 회화에 관한 자료⋅지식⋅논의 등을 실은 [역대 명화기(歷代名畫記)](835년쯤) 등에서도 세 사람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그의 예술 세계는 제재가 매우 광범위하다. 고개지⋅육탐미의 제재가 주로 ‘인물과 복장’에 한정된 데 비하여, 그는 갖가지 종류를 취하였다. 또한 사상이 진보적이었다. 이를테면 불전(佛殿)의 벽에 공자[孔子, B.C.551~B.C.479, 중국 춘추(春秋) 시대의 교육자이며 철학자⋅정치 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와 10제자를 그린 것이나, 술에 취한 승려를 그린 것은 불교에 대한 비웃음의 뜻이 담겨 있다.

기개가 웅건하고 자체(字體)가 웅장하며, 불교 인물화의 얼굴 형태가 비교적 풍만하고 건장하다. 따라서 ‘사람을 그리는 아름다움에 있어서 장승요는 그 육(肉)을 얻었고, 육탐미는 그 골(骨)을 얻었으며, 고개지는 그 신(神)을 얻었다.’고 언급된다.

또한 싸우는 용⋅호랑이 및 교룡(蛟龍)이나 뛰어오르는 말[馬] 등 아슬아슬한 싸움 장면을 그렸다.

인도(印度)와 서역(西域)에서 들어온 명암법(明暗法, chiaroscuro, 대상의 형태를 관찰하여 빛의 현상에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 관계 및 그 변화를 파악하여 입체감 있게 표현하는 방법. 음영법)을 받아들여, 주홍색과 청록색을 써서 색면(色面)에 의한 입체 표현도 하였는데, 이를테면 일승사(一乘寺)에 ‘요철화(凹凸畫)’를 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그 절은 ‘요철사’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이 그림은 그 뒤 몰골법(沒骨法, 윤곽선을 쓰지 않고 수묵⋅채색으로 형체를 짓는 법)과 장식 도안의 표현 방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수화(山水畫)에서도 윤곽선을 쓰지 않는 몰골적인 준법[皴法, 동양화에서 산애(山崖)나 암석의 굴곡 등의 주름을 그리는 화법. 산이나 흙더미 등의 입체감⋅양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동양적 음영법(陰影法)]을 채용하였다.

그의 진적(眞跡)은 현재 전하지 않지만, 북조(北朝) 후기에서 성당(盛唐) 이전까지의 비교적 풍만하고 건장한 많은 조소 작품과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사(法隆寺)의 정토변상(淨土變相)에서 그의 규범을 찾아볼 수 있다.

‘오도현의 그림과 양혜지(308)의 조소는 장승요의 신필(神筆)에서 얻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당대(當代)의 두 예술가 오도현⋅양혜지의 선구(先驅)는 바로 장승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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